[인터뷰] 9년 만에 복직하는 조종철 철도노조원

2월 8일 전국철도노동조합(위원장 강철)과 철도공사(사장 오영식)는 짧게는 4년, 길게는 14년까지 해고 상태에 있던 98명의 해고자 복직에 합의했다.

철도노조 호남지역본부 소속 해고자 11명 중 순천지역 해고자는 7명이다.
그들 중 2009년 철도노조 호남본부장으로 민영화 반대 파업투쟁을 이끌었다가 해고당한 조종철씨를 만났다. 그는 해고 기간에도 철도문화마을만들기 활동에 주력하며 호남철도협동조합 사무국장으로 왕성한 활동을 하고 있다.
 

▲ 2009년 철도노조 호남지역본부 본부장으로 철도민영화 반대 파업투쟁으로 해고된 조종철씨


6개월 신입사원이 던진 파문!

조종철씨는 1995년도에 철도공사(당시, 철도청) 광주전기사무소에 입사했다. 당시 철도노조는 한국노총 소속 사업장이었고 민주노조로써의 역할을 제대로 하지 못했던 시절이었다.

입사 후 몇 년 동안은 불안감과 억압적인 직장 문화 때문에 힘들었다고 조종철씨는 회상한다.
“당시 24시간 2교대 근무를 하면서, 평생 이런 근무형태로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불안감이 있었다. 그건 몇 개월 지나니 익숙해졌지만, 춭퇴근 시간도 관리자 눈치봐야 하고, 쉬는 날도 일하러 나가야 하는 등 직장내 조직문화가 너무 힘들었다”

그런 조직문화에 작은 파열구를 내는 일이 있었다. 입사한지 6개월째인 1995년 12월 크리스마스 이브날, 첫 연휴를 아내와 보내고 있는데 관리자로부터 다음날 출근하라는 전화를 받았다. 이틀 연휴이니 당연히 출근하지 못한다고 하자, 관리자는 화를 내면서 전화를 끊었다. 조종철씨는 곧바로 전화를 해서 ‘사정을 해도 부족할 마당에 왜 부당한 업무 지시를 하면서 화를 내냐?’며 따졌다.

연휴 끝나고 출근했더니 선후배들이 하얀 눈밭에서 일을 하고 있었다. 그 해 끝날 공사가 미뤄지자 철도청 직원들을 동원해 일을 시키는 것이 관행이었던 것이다. 그 시절 관리자의 업무 지시를 거부한 것이 바로 6개월 신규직원인 조종철 씨였다.

“당시에 눈총을 많이 받았지만 그 후엔 부당한 업무지시를 하지 않아 편해졌다. ‘조종철은 저런 놈이구나’ 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어용간부와 관리자가 현장을 통제하던 시절을 넘어!

1995년 당시 철도노조는 지금처럼 조합원들이 직접 노동조합 위원장을 뽑는 게 아니라, 3중 간선제라는 제도하에서 위원장 선거를 치뤘다. ‘3중 간선제’는 세 번 간접선거를 거쳐서 철도노조의 위원장을 선출하는 제도로, 조합원수가 3만명이 넘었지만 정작 노동조합 위원장을 선출한 조합원은 고작 93명의 대의원에 불과했다. 당시 철도노조를 민주노조라 불리울 수가 없는 대표적인 사례였던 것이다.

2000년 1월 대법원은 ‘철도노조 3중 간선제 위헌 판결’ 결정을 하게 된다. 2001년 5월 조합원 직선제 선거를 통해 철도노조는 민주노조의 깃발을 새롭게 올렸다.

“당시 철도노조 간부들은 승진, 발령 등의 문제에 깊이 개입했다. 노조 간부들에게 잘 보이면 관리자들에게 말이 들어가게 되고, 관리자들은 노조 간부들을 통해서 현장을 통제했다.”
“관리자들이 노조 간부 후보를 내고 조합원에게 투표를 하게 했다. 분산 사업장의 경우 사업소별로 10명 정도 근무하는데, 투표용지 상단에 손으로 자국을 남겨놓아서 누가 누구를 찍었는지 다 알았다. 관리자의 요구대로 투표를 할 수 밖에 없는 상황을 만들어 놓는 거다”

2001년 직선제 선거로 전국의 5개 지방본부(서울,부산,대전,영주,순천) 중 대다수 지방본부에서 민주적인 집행부가 들어섰지만, 순천지방본부(현, 호남지역본부)는 우여곡절을 겪은 끝에 2007년이 되어서야 민주 집행부가 들어서게 되었고, 조종철씨는 2009년 철도노조 호남본부장을 맡았다.
 

200여명의 해고자와 함께 한 철도노동자!

▲ 2017년 12월 철도해고자 복직을 요구하며 철도공사 본사 앞에서 투쟁중인 철도해고자들


철도노조는 2001년 민주노조로 선 이후 우리나라 대기업, 공기업 사업장으로서는 가장 많은 파업투쟁을 전개한 노동조합이다. 2002년, 2003년, 2006년, 2007년, 2013년, 2016년 파업 등으로 많게는 200여명의 해고자가 생겨나기도 했다. 해고자들의 기본적인 생계는 조합원들의 조합비로 책임져왔다. 몇 번의 조합비 인상이 있었고, 해고자가 줄어들면 조합비를 인하했다. 해고가 예상되는 싸움을 벌이는 노동조합과 간부들, 해고자들의 생계를 책임지기 위해 조합비 인상을 기꺼이 감내하는 조합원들. 이들을 이렇게 만든 것은 과연 무엇일까?
“어용노조에서 민주노조로 바꾼 기나긴 투쟁의 과정에서 노동조합과 간부들에 대한 신뢰가 쌓인 것이라고 생각한다. 민주노조가 들어서고 나서 노무현 정권 이후부터 박근혜 정권까지 국민철도를 지키기 위해 정권과 맞서 싸워온 게 철도노조다. 조합비 인상에 대해 어려움도 있지만, 헌신적인 철도노조 간부에 대한 신뢰와 해고자에 대한 믿음이 있다고 본다”
 

복직하면 철도마을 만들기는 어떡하지?

모든 이들이 그의 복직을 축하할 때 걱정이 태산인 사람들이 있다. 철도관사마을 주민들과 철도문화마을 만들기 사업을 함께 했던 공무원들을 비롯해서 인연을 맺은 사람들이다.

그는 2013년 2월 호남철도협동조합을 만들어, 백여 년 철도역사의 근대자원인 순천 조곡동 철도관사마을을 중심으로 철도문화마을 만들기 활동에 전념하기 시작했다.

지난 5년여 동안 철도관사마을에서는 크고 작은 변화가 나타났다. 마을주민 구술생애사 책자 발간, 협동조합이 운영하는 철도마을카페 기적소리, 월 1회 마을 작은 음악회, 철도마을축제, 마을달빛마실, 철도게스트하우스, 철도마을방송국, 철도마을 박물관과 다양한 체험프로그램 등 철도노조와 철도협동조합과 마을 주민들이 함께 만나 그들만의 색깔로 철도마을만들기 활동이 전개됐다.
 

▲ 2014년 1월 오픈한 철도마을카페 ‘기적소리’. 철도노조 건물 한켠을 노동조합이 내어주고 철도조합원들이 출자하여, 마을 주민들을 위한 마을카페가 만들어졌다.
▲ 2017년 조곡동 철도관사마을에 자리잡은 순천마을방송국

이런 활동에 조종철씨가 중심에 있었던지라 그의 복직을 축하하면서 앞으로 철도관사마을은 어떡하냐는 우려도 많다. 그동안 그의 활동의 발자취가 얼마나 컸는지 가늠해보게 된다.

작은 마을공동체가 어떻게 바뀌어 갈건지!

“그동안 주민들에게 이사와서 살라는 이야기를 많이 들었다. 철도마을만들기 활동은 내게는 하나의 작고도 소중한 실험대 같은 것이다. 학생운동, 진보정당운동, 노조운동을 하면서 당연히 좋은 사회를 꿈꾸기도 했다. 철도관사마을이라는 작은 마을속에서 마을공동체가 어떻게 만들어지고 바뀌는가에 대한 하나의 실험을 하고 있는 것 같다. 직책에 대한 욕심 부리지 않고, 주민들을 만나고 서로 신뢰의 관계를 쌓아가면서 좋은 세상을 만들고 싶다”
철도관사마을의 변화 속에 마을 사람들과 철도노조의 관계도 친밀해졌고, 마을사람들 역시 철도관사마을에 대한 자부심이 커졌다. 작은음악회로, 마을카페로, 마을축제로, 마을의 소소한 일들로, 다양한 형태로 마을 사람들이 마을로 많이 나오고 있다고 한다.

조종철씨는 여전히 다양하게 마을을 만나고 있고, 그 공동체에 들어있다는 것만으로도 큰 의미가 있다고 한다.
 

철도 + 마을에 예전처럼 푹 빠질거에요!

복직 축하선물로 철도관사마을에 있는 지역아동센터 센터장으로부터 케익 선물을 받았다는 조종철씨는 9년 해고생활을 정리하고 현장에 복직해서는 신규자 처럼, 일하면서 여전히 마을공동체 활동을 계속 할 예정이다.

이제까지 그래왔던 것처럼 더 겸손하게 소리내지 않고, 철도마을만들기에도 푹 빠질 것이고, 지역에 공공철도를 알리는 길에도 푹 빠질 것이라고 한다.

새로운 세상, 행복한 공동체를 향한 철로 위 그의 발걸음은 여전히 부지런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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