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천시는 여전히 농촌지역이 도시지역 보다 압도적으로 넓다. 도시문제와 함께 농촌문제를 고민해야 하는 이유이다.
외서면에서 17년 째 농사를 짓고 있는 김계수 조합원이 농촌의 일상을 전하는 칼럼을 싣는다. <편집자 주>

 

 

▲ 김계수 조합원

김장용 절임배추를 판매하는 일은 몇 가지 이유로 살얼음 같은 경계 위를 걷는 듯한 긴장감을 동반한다. 우선은 배추가 밭에서 얼지 않은 상태로 작업을 마쳐야 한다. 그런데 그게 결코 만만한 일이 아니다. 내가 사는 동네는 해발 고도가 200미터에서 400미터 정도 되는 중산간지 혹은 준고랭지여서 고흥이나 낙안 등 인근의 따뜻한 지역에 비해 평균 기온이 낮고 일교차가 크다. 봄에 감나무의 새싹은 열흘 이상 늦게 돋고, 가을에 코스모스는 그만큼 빨리 진다.

기온이 낮고 일교차가 크면 배추의 살이 단단해서 김치의 아삭한 맛이 더하고 당도도 높지만 통이 저지대에 비해 크지 않고 체(배추의 키)도 짧다(그 때문에 일부 농가에서는 배추에 과수원에서 주로 쓰는 성장촉진제를 쓰기도 한다). 따라서 배추 파종도 그만큼 빨라야 하고 추위도 빨리 찾아온다. 그래서 12월 초부터 갑작스런 강추위로 밭에 세워둔 배추가 얼지 않을까 걱정이 시작된다. 이런 조건 때문에 우리 지역의 배추 수확은 서울 등 중부 지방의 김장 시기와 어울리지만 주된 소비처인 남부에서는 12월 말까지 김장이 이어지기 때문에 동해에 대한 걱정은 해결이 어려운 숙제다. 배추를 뽑아두지 못하고 추위를 맞을 때는 흰색 부직포를 덮어두면 4∼5도 정도 보온 효과를 볼 수 있다. 올해는 지난해보다 강추위가 빨리 찾아와 일부 배추는 얼어서 쓸 수가 없게 되었다. 심한 동해를 입은 배추를 절이면 뜨거운 물에 데친 것처럼 물러지고 줄기의 표피가 분리된다.

반면에 초겨울 날씨가 따뜻하면 배추가 계속 자라는데, 이때 수확이 늦어지면 노란 배추 속잎이 하얗게 변하고 속에서 꼬부라지면서 뒤엉켜 상품성이 없어진다. 따라서 배추씨를 파종하고 정식하는 시기 또한 마냥 빨리 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배추의 크기 또한 맛과 직결되는데, 너무 큰 배추는 수분과 질소질이 많아 살이 무르고 심심하다. 생배추로 2.5∼3kg 안팎에 두 쪽 낼 정도 크기의 배추가 알맞다. 그러나 대부분의 소비자들은 푸른 잎을 싫어해서 노란 잎이 가득한 크고 맛있는 배추를 원하는데 그런 배추는 없다. 무릇 ‘좋은 것’에는 시간이 필요한 법이다. 배추도 더디 큰 것이 맛있다.

이번 주에 절임배추 작업을 마쳤다. 한 달 동안 전쟁을 치른 듯하다. 배추 캐오고, 절이고, 씻고, 포장하고, 배달하느라 새벽 두 시 전에 잠을 자본 적이 없는 것 같다. 새벽 네 씨까지 일한 적도 있다. 사람 잡을 일이다. 건강에 문제가 있지만 깔끔하고 책임감이 남다른 아내에게 몹시 미안하다. 내년에는 더 이상 못할 듯하다. 그러나 내년 배추농사가 생배추로 시장에 내도 될 만큼 크지 않는다면 애써 지은 배추를 밭에서 썩히지 못하고 또 절이려 들지도 모를 일이다.

올해 우리 집에서 절여서 판매한 배추는 20kg 짜리 상자로 200개 남짓이다. 대부분 오래된 단골 고객의 주문이다. 사람들이 김장하는 양은 해마다 급격하게 줄어들고 있다. 이는 완제품 김치를 사서 먹는 가정이 많아진 탓도 있지만 우리 국민들의 쌀 소비량이 급격히 감소하고 있는 현상과 맞닿아 있다(지난해 1인당 쌀 소비량은 연간 67.2kg으로 1970년대의 절반 이하로 떨어졌다). 이는 또한 학교 등 대형급식소와 외식의 증가로 인한 소위 ‘집밥’의 감소와도 직결된다.

집밥이라니! 고약하기 이를 데 없는 말이다. 예전에는 밥이란 마땅히 집에서 먹는 것이었다. 밥상은 가족의 건강을 배려한 어머니의 사랑이 노고로써 구체화되는 공간이었고 가족공동체가 구현되는 표상이었다. 그러나 가족을 식구(食口)와 같은 의미로 여기게 했던 집밥은 이제 예외적인 것이 되어 제법 품위 있고 여유로운 생활방식의 하나로 선망의 대상이 돼버렸다. 보편화된 외식이 치열해진 경쟁과 바쁜 일상으로 인해 대부분 패스트푸드나 면류로 채워진다고 보면 우리 국민의 소득이 늘어남에도 불구하고 식생활 수준은 더 저급해졌다고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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