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천광장신문은 협동조합이 만든 신문이다. 조합원들이 우리 주변의 사람들을 소개하고, 생활 주변의 이야기를 담을 때 협동조합 언론으로서 그 가치와 의미를 살릴 수 있을 것이다. 그 과정이 곧 순천지역의 다양한 사람들 간의 소통을 가능하게 하고 공동체를 따뜻하게 할 것으로 보고‘IN 순천, 순천인’을 기획한다.


공원에 매일 보이는 할아버지가 있다.
점심 지나 햇볕이 제일 좋을 때 잠깐 계신다. 큰 공원이 아니라 멀리 볼 것도 없는 공원에서 무엇을 하고 계실까? 할아버지 손에는 꽹과리가 있다. 그리 크지 않은 소리로 작게 두드리신다. 오래 머무르지 않는 것을 보면 갈 곳이 정해진 것 같다. 오늘도 할아버지가 계실듯해서 공원에 가보았더니 꼭 그 벤치에 앉아계셨다. 구례가 고향인 할아버지(이동해 씨 76세. 해룡면)는 젊어서 농협에 다니셨다. 98년에 명예퇴직한 후 지금은 은퇴 후 생활을 하고 계신다. 소일거리로 복지관에 다니며 사물놀이를 배우는데 연습 겸 산책 겸 매일 공원에 나온다고 하셨다.
 

▲ 소일거리로 복지관에 다니며 사물놀이를 배우는데 연습 겸 산책 겸 매일 공원에 나온다고 하셨다.

구례가 본가인 할아버지는 직장생활 하는 막내딸의 육아를 돕기 위해 딸 근처에 이사를 오셨다. 딸이 많으면 비행기 여행하고 산다는데 할아버지는 다복하게 네 딸을 두셨다. 딸이 많아 서 비행기 여행은 많이 하셨는지 선물은 많이 받으시는지 여쭤보자 “아니아니! 즈그들만 잘 살믄 되었지. 부모라고 받기를 기대 하믄 못써. 내가 큰돈은 없어도 지금 쓸 것 하고 나중에 요양원 갈 것은 있어.” 하신다. 시골에서 살았어도 자녀들이 잘 성장해 좋은 직장에 다니고 알뜰하다며 칭찬이 마르질 않으신다. “내가 자랑이 많았지?” 하시는데 자녀 사랑이 깊게 느껴진다.
 
할아버지는 젊어서 자녀들에게 좋은 교육을 못해준 것이 늘 서운했다. 그래서 딸들이 결혼한 후 손자들이 생길 때 마다 육아를 도와주었다. 큰딸을 따라서 광주에서 15년, 둘째 딸과는 익산에서 5년, 지금은 막내딸을 위해 순천에서 5년째 살고 있다. 할아버지 나름의 원칙이 있는데 육아를 돕더라도 절대로 자녀들과 한집에 살지는 않는다. 자녀들 근처에서 따로 생활해야 서로 편하다고 하신다.
 

▲ 이동해 씨 (76세). 구례가 본가인 할아버지는 직장생활 하는 막내딸의 육아를 돕기 위해 딸 근처로 이사를 왔다.

그렇게 키운 첫 손녀가 올해 24살이고 막내 손자는 이제 7살로 모두 아홉의 손자 손녀를 돌보셨다. “큰일 하셨네요. 따님들은 의지할 곳이 있어 편하겠어요.” 했더니 “안사람이 다했지. 나는 따라만 다녔지.” 하며 할머니의 공이라고 돌리신다. 누구의 공이 더 큰지 저울로 잴 수는 없을 것이다. 자녀를 위해 평생 살던 고향을 떠나 20여 년 동안 객지 생활을 했다는 것만으로 그 사랑이 충분히 전달되고 느껴졌다. “할머니는 지금 어디계시고 혼자 나오셨어요?” 했더니 둘째 딸이 익산에서 죽 가게를 하는데 주말마다 가서 도와주느라 오늘은 혼자 계신다고 한다. 조금 서운하신가보다. “할머니가 자녀들한테도 잘하고 이웃들에게도 잘하는데 나한테만 못해. 나한테는 관심이 없어” 하시며 소박하게 웃으셨다. 최근에 둘째 딸이 ‘죽 가게 2호점’을 오픈했다며 일이 많아서 걱정이라고 하신다.

부모란 그런 것인가?
다 내어주고 또 내어줄 것을 찾아본다. 젊어서는 가진 것을 다 쏟아내어 주고 노후에는 시간과 품이라도 내어 준다. 기어이 가진 것을 모두 주어야 더 행복하다. 우리의 부모님들은 그러신 것 같다.

문득 엄마가 사다준 죽 한 그릇이 생각났다.
이동해 할아버지와 동갑이신 엄마는 그 시절에 여고를 졸업하신 고운 분이셨다. 항암치료를 하던 엄마는 나의 고집으로 순천으로 이사를 왔었다. 같은 아파트 앞 동에서 사셨는데 우리 집에 매일 오셔서 살림을 하셨다. 요양하라고 부모님을 오시게 했지만 결과적으로 일만 더 드린 모양새가 되었다. 

그해 겨울 어느 날 나는 몸살이 나서 끙끙대며 누워있었다. 목이 부어 아무것도 먹지 못했다. 엄마가 나를 보더니 어디론가 나가셨다. 거의 두 시간이 다 지나 돌아온 엄마는 죽 그릇을 들고 있었다. 순천 길도 모르는 암 환자가 차가운 겨울 아침을 걸어 다니며 사온 죽 그릇을 보니 화가 치밀었다. 먹을 수가 없었다.

“엄마 못 먹겠어. 있다가 빈이(아들) 먹일게” 했다.
엄마는 설거지를 하시며 들릴 듯 안 들릴 듯 중얼거리셨다.
“나는 내 딸 먹이려고 사왔는데, 너는 네 아들 먹이려고 하냐?”

▲ 그해 겨울 엄마가 사다준 ‘죽 한 그릇’ 
    이동해 할아버지의 따님이 운영하는 가게와 같은 체인점이다.

내리 사랑
돌려받지 못할, 돌아오지 못할 사랑을 주기만 한다.
그 사람은 부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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