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천시는 여전히 농촌지역이 도시지역 보다 압도적으로 넓다. 도시문제와 함께 농촌문제를 고민해야 하는 이유이다.
외서면에서 17년 째 농사를 짓고 있는 김계수 조합원이 농촌의 일상을 전하는 칼럼을 싣는다. <편집자 주>


나이가 지긋한 농부들은 곡식을 거둬들이는 일을 ‘가실한다’고 말한다. 우리 지역에서는 사계 중에 가을을 가실이라고 불렀으니 그 말은 ‘가을걷이한다’는 뜻의 지역 말이다. 참깨처럼 여름에 수확하는 것이 있기는 

하지만 대부분의 알곡은 가을에 수확하기 때문에 계절을 나타내는 말이 곡식을 수확하는 의미로 확장되어 쓰이게 된 듯하다. 그러나 보통 가실한다고 하면 주식인 벼 수확을 뜻했는데, 이를 볏가실이 아닌 나락가실이라 하고 봄에 수확하는 보리에도 보릿가실이라는 말을 썼다.

나는 올해도 동네에서 나락가실을 가장 늦게 했다. 해마다 되풀이되는 일이다. 논으로 들어오는 물길이 좋지 않고 일하는 솜씨도 더딘 탓에 모내기를 가장 늦게 했으니 가실일도 늦을 수밖에 없다. 

그런데 올해 우리 논에는 대표적인 논 잡초인 피가 너무 많아 피농사를 지은 셈이 되었고, 나락가실 또한 일부는 피가실이 되고 말았다.

나는 모내기를 끝내면 새끼우렁이를 논에 풀어 김매기를 대행케 하는데, 우렁이는 물이 없는 곳에는 가지 않으니 우렁이로 제초를 하기 위해서는 모내기 전 써레질할 때 논바닥을 평평하게 잘 골라야 한다. 

그러나 산골 논들은 모양이 반듯하지 않아 논바닥 고르는 것이 만만치 않고, 쥐가 논둑에 구멍이라도 뚫게 되면 물이 빠져버리기 일쑤여서 우렁이로 잡초를 완벽하게 처리할 수는 없다. 

그래서 재작년까지는 모내기를 하고 서너 주가 지난 논바닥에 김이 나기 시작하면 손으로 김매기를 해주었다(나이 많은 농부들은 김을 지심이라 하고 논밭에 김이 나는 것을 짓는다고 말한다).

그러나 지난해부터 밭농사를 늘리면서 손으로 김매기 할 짬을 내지 못해 꽤 많은 피가 자라 논에 씨를 남기고 말았다. 

올해 모내기를 하고는 그게 은근히 걱정되었는데 아니나 다를까 논바닥이 높아 물이 잘 들지 못한 곳에는 벼 포기와 잡초를 구분하기 힘들 정도로 전체가 잔디밭이 돼버렸다. 

밭농사에 옥죄여 김매기를 차일피일 미루다 이삭이 패고 여물면서 결국 논에 들어서지 못하게 되었다. 

벼들이 피 숲 속에서도 웬만큼은 남아있으려니 기대했는데, 나중에 피는 벼보다 한 뼘 이상 더 자라는 바람에 심한 곳에서는 벼와 함께 쓰러지고 주저앉아 벼 이삭을 찾을 수 없게 되었다.

이 지경이 된 논이 동네 들머리에 있으니 농사꾼으로서 남부끄럽고 동네 사람들의 반응에도 은근히 신경이 쓰인다. 

일 잘하기로 둘째가라면 서러울 할머니 한 분이 ‘나 같으면 논을 저렇게 안 둬. 두어 시간이면 저서버릴 건디’ 하신다. 나를 보고 직접 하시는 말씀이니 당신들끼리 모였을 때는 훨씬 더 심하게 입방아에 올랐을 것이다.

 그 할머니는 피가 파랗게 나기 시작했을 때부터 저것을 그대로 뒀다가는 나중에 나락 못 먹을 거라고 정확하게 경고하셨던 분이다.

농사일에서는 때를 잘 맞추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김매기도 풀이 어렸을 때 하면 일도 수월하고 시간도 훨씬 적게 든다. 그것을 조금씩 미루다가는 나중에 큰 고생을 하거나 아예 손을 쓸 수 없게 되기도 한다. 

올해 벼농사는 농사꾼으로서 내 자부심에 큰 상처를 남겼고  농사를 다시 돌아보게 한다. 곡식이든 채소든 씨를 뿌렸으면 먹을 수 있는 모양으로 길러 수확을 해야 마땅하다. 

그러나 나는 벼농사 외에도 밭작물 몇 가지를 전혀 수확하지 못했다. 일의 때를 놓친 것도 있고 풀 때문에 버린 것도 있고, 가뭄이 원인인 것도 있다. 가뭄 때문이라면 어쩔 수 없지만 닭 농사에서 벗어나 보겠다는 생각으로 밭농사를 늘린 것이 보다 큰 원인이다. 

능력의 한계를 제대로 가늠하지 못하고 욕심을 부린 것은 분명히 어리석은 일이다. 한편으로는 게으름을 피운 것 같기도 하다. 마음속에서 절실함이 사라진 건 아닐까.

그나저나 내년 농사가 걱정이다. 논바닥을 허옇게 뒤덮은 피씨가 안겨줄 일감을 내년에 어떻게 감당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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