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월초에 새 학년을 시작하는 우리나라의 학교는 새봄의 시작과 함께 ‘새로운’ 시작을 맞이한다. 하지만 푸코의 말처럼 감시와 처벌의 제도화된 공간으로서의 학교, 다인수 과밀화된 학교에서 ‘새로움’이 자리할 곳은 별로 없어 보인다.
학교를 지배하는 것은 촘촘하게 엮어진 제도와 관습화된 일상이다. 그러기에 정작 학교는 교육대상으로서의 학생은 존재하지만, 배움과 성장의 주체로서의 ‘사람’이 들어설 자리가 별로 없어 보인다. 올봄에 핀 꽃이 작년에 핀 꽃이 아니듯, 봄에 만난 학생들은 ‘새로운 존재’라는 사실만으로도 존귀한 가치가 있는 것이 아니겠는가.
봄에 만난 학생들, 새롭고 존귀한 존재
학교는 다수의 평범함보다는 극소수의 특별함에 더 주목하고 있다. 언제부턴가 학교는 세계화 시대를 주도할 인재를 육성한다는 이데올로기에 포획돼 있다. 더불어 사는 민주시민을 육성한다는 공교육의 책무는 알량하게도 정책적 수사로만 존재하고 있는 듯 보인다. 대학 서열화와 대학입시에 목을 매고 있는 고등학교는 물론, 중학교, 초등학교에 이르기까지 ‘특별한’ 아이, ‘일등’과 ‘일류’의 아이들을 만들어내느라 분주하다. 그래서 한국의 교육은 ‘길러내기’보다는 ‘골라내기’, ‘걸러내기’, ‘갈라치기’에 너무도 열심이다.
배운다는 것은 자기를 낮추는 것이라 했던가. 그 어떤 원대한 이상의 밑바탕에도 발을 딛고 선 땅이 있게 마련이다. 그 땅을 온통 채우고 있는 봄꽃은 작은 풀꽃들이다. 우리가 우아한 품격의 대명사 목련과 같은 꽃에 주목하고 있는 사이에 이름도 모르는 그 풀들이 꽃을 피워내고 있었던 것이다. 우리 학교 교정에도 민들레, 냉이, 제비꽃에서 예쁜 이름의 봄마중, 이상한 이름의 개불알풀까지 수줍은 듯 소박하게 꽃을 내보이고 있다. 이 모두가 존귀하지만 모두가 특별하지는 않다. 그 평범한 녀석들이 만들어내고 있는 봄의 세상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배운다는 것은 자기를 낮추는 것
그래서 이 봄에 이런 생각을 해본다. 가끔은 하늘을 보라고 했던가. 그래, 가끔은 발 아래로 시선을 옮겨 보면 어떨까. 이 때야 비로소 결코 특별하지 않은 평범한 아이들을 존귀하게 대하고, 그들의 소중함에 주목할 수 있으리라. 그들이 잘 배우고 성장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일. 그것이 말도 많고 탈도 많은 우리교육의 가장 앞세워야 할 지향이어야 하지 않겠는가.
어디 핀들 꽃이 아니랴. “자세히 보아야 / 예쁘다. / 오래 보아야 / 사랑스럽다. / 너도 그렇다.” 풀꽃에 대한 나태주 시인의 발견은 새삼스럽게 경이롭다. “진정한 발견은 새로운 땅을 찾는 게 아니라, 이미 있는 것을 새로운 눈으로 바라보는 것”이라는 프랑스의 소설가 마르셀 프루스트 말에서 희망의 싹을 발견한다. 높고 특별한 것에서 사소하고 평범하며 낮은 것에 시선을 두면 이런 위대한 발견도 가능해지리라. 그래서 대시인 고은은 이런 위대한 시를 세상에 내놓았을지 모른다.
“내려갈 때 보았네. / 올라갈 때 보지 못한 / 그꽃”(고은, <그꽃> 전문)
최명주
고흥영주고등학교 교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