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 강점기, 전쟁 위해 노동력 약탈당한 소녀들

군대식 규율과 감금에 임금도 제대로 못 받아

‘일제는 아시아태평양전쟁 말기 노동력 부족에 시달렸다. 이를 충당하기 위해, 식민지 조선에서 다수의 미성년 여성들을 군수공장으로 동원했다. 여자근로정신대란 이들을 말한다.

1944~45년경, 주로 10대 초중반의 여학생들(평균연령 14~15세)이 교장 및 담임선생의 지원종용(‘강제’)과 거짓말(상급학교 진학, 높은 임금과 같은 조건 제시)에 속아 동원됐다.

그들이 간 곳은 한반도와 일본 지역의 군수공장으로 알려져 있다. 현재 한국정부가 확인해서 공식 인정한 여자근로정신대 방식의 일본 작업장은 도쿄아사이토(東京麻絲)방적, 미쓰비시(三菱)중공업, 후지코시(不二越)강제 등 세 곳이다. 특히 광주전남지역에서 ‘미쓰비시중공업 나고야 항공기제작소’로 강제동원 된 여자근로정신대는 150여 명에 이른다.
 

▲ 1944년 미쓰비시에 동원된 여자근로정신대원들. 겨우 10대 초중반의 나이 어린 소녀들이었다. (사진 제공. 근로정신대 할머니와 함께하는 시민모임)

일본기업에 강제 동원된 이들은 군대식 규율과 감금 상태의 환경에서 기숙사와 공장을 오가며 하루 8~10시간의 장시간 노동에 시달렸다. 해방이 되자 임금도 제대로 받지 못한 채  고향으로 돌아왔으나, 대다수 힘겨운 삶을 살아야했다.

‘근로정신대’를 일본군 ‘위안부’로 여겨온 한국사회에서 피해자들이 자신을 드러내는 데는 큰 용기가 필요했다. 피해자들은 1990년대부터 일본정부와 가해기업을 상대로 사죄와 피해배상을 촉구하는 소송에 나섰다.
 

▲ 미쓰비시중공업 나고야 항공기제작소 기숙사에 도착한 광주전남 출신 근로정신대원들의 모습. )1944년 6월), (사진 제공. 근로정신대 할머니와 함께하는 시민모임)

한국사회에서 거의 조명받지 못했던 ‘근로정신대’ 문제는 ‘나고야 미쯔비시 여자근로정신대’할머니들의 일본정부를 상대로 한 소송과 일본의 양심적인 지식인과 시민들로 구성된 ‘나고야소송지원회’의 활동, 그리고 ‘근로정신대 할머니와 함께하는 시민모임’에 의해 세상에 알려지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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