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계산의 지명과 유래

조계산은 남도의 명산으로 송광사와 선암사가 있는 불교문화의 중심이며, 순천사람의 주요한 삶의 터전이다. 
순천시 송광면 출신인 김배선 씨는 약 15년 동안 조계산과 그 주변 마을을 누비면서 주민의 이야기를 수집하고 현장을 답사한 자료를 토대로,  ‘조계산에서 만나는 이야기’라는 책을 냈다.
이 책 주요 내용 중 일부를 김배선 씨의 동의를 받아 순천광장신문 독자들과 함께 공유하기 위해 연재한다. 편집국


▲ 김배선 향토사학자

조계산 정상(장군봉)에서 멀지 않은 서북쪽 능선 가까운 곳에는 오래전부터 원주민들이 특별하게 여겨오던 샘(泉)이 하나 있다. 선암사에서는 이 샘을 ‘조계천(曹溪泉)’이라 하였으며, 이 물이 흘러내리는 골짜기 아래 마을인 신전리 사람들은 ‘참샘’이라고 불렀다.

조계천의 위치(고도: 853m, 좌표: 35-00-25N. 127-18-28)를 좀 더 자세하게 설명하자면 장군봉에서 연산봉으로 돌아가는 줄기의 300m 지점인 쪼끔산 정상과 장박골 정상 사이의 잘록한 허리 오른쪽(북쪽)의 40m 아래 골짜기가 형성된 곳이다.

지금은 사람의 발길이 거의 끊겨 풀숲에 묻혀있지만 현장을 찾아보면 사진에서 보듯 오랜 역사의 흔적을 알 수 있다. 

원주민들이 샘을 특별하게 여겼던 것은 도무지 샘물이 솟아나지 않을 것 같은 800m 높이의 능선줄기 바로 밑에서 맑은 물이 쉬지 않고 솟아나기 때문이다. 조계산을 찾는 사람들에게는 이처럼 고지에 있는 샘이 귀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필자는 조계천이라는 이름이나 샘을 관리한 흔적을 볼 때 단순히 사람들에게 목마름을 덜어주는 샘 이상의 이유가 있을 것으로 생각했다. 그래서 오랜 세월 이 샘을 벗 삼아 살아왔을 것으로 짐작되는, 조계천에서 가장 가까운 접치와 신전 두 마을과 선암사에서의 증언과 기록을 통해 숨어있는 내력과 인과관계를 찾아보았다.


조계천과 주변 마을의 관계

조계천과 가장 가까운 마을은 조계산의 북동쪽에 있는 선암사를 비롯하여 신전과 접치마을이다. 그러나 이 세 마을과 사찰은 조계천과의 관계가 조금씩 다르다. ‘조계천’이라는 이름은 선암사에서 명명한 것이고, 신전마을에서는 ‘참샘’이라고 하고, 접치마을에서는 그저 ‘샘’이라고 한다. 그것은 각기 마을과의 관계가 설명해 주고 있다. 

조계천은 접치마을 사람들이 가장 많이 사용한 샘이다. 현재 접치에서 올라가는 등산로 가까이에 있는 샘의 위치가 마을의 당시 생활권이었기 때문이다. 접치마을은 조계산(장군봉)의 북서쪽의 현재 접치등산로 입구마을이며, 조계천까지는 지름길로 1시간이 걸리지 않는다.

옛날 산중에서 한 시간 거리라 하면 생활권으로서도 매우 가까운 거리에 속한다. 마을 사람들의 증언에 의하면 1960년대 말까지도 접치사람들은 거의 매일 나무나 산나물 채취를 위해 조계산을 드나들었고, 장군봉 방향으로 갈 때면 샘길로 다녔다. 여름이면 접치마을 나무꾼들이 물을 마시거나(밥 먹고) 목욕하는 쉼터로 유명한 곳이었다고 한다.

지금은 접치마을이 20여 호에 불과하지만 해방 이전까지만 해도 60호가 넘는 큰 마을이었다. 마을 사람들 모두가 조계천을 제집 드나들듯 하였으며, 지금까지도 마을의 뒤편 골짜기를 따라 등산로 능선을 넘어 조계천으로 가는 지름길 흔적이 남아 있다.  접치마을 사람들에게 조계천은 생활현장의 샘이었음을 말해주고 있다.

신전마을은 조계천으로부터 동북으로 뻗어 내리는 골짜기의 하단에 자리 잡은 마을이다. 조계천과는 접치마을과 비슷한 거리임에도 지리적으로 접근성이 떨어져 훨씬 멀게 느껴진다.
1960년대까지 샘(조계천)을 오르내렸던 신전사람들의 기억을 빌리면 접치마을 사람들 못지않게 조계천에 다녔다고 주장한다. 다만 접치마을이 현장중심이라면 신전리는 관계중심이라는 다른 인과관계를 보여준다.

신전마을은 위치가 조계천과 같은 골짜기 안에 있다. 그래서 마을을 가로 지르는 신전천은 발원지가 조계천이다. 그러므로 신전마을 사람들이 농사와 생활의 근본인 신전천의 뿌리를 각별하게 여겼다.

신전마을 사람들은 조계천을 ‘참샘’이라고 부른다. 더불어 신전마을의 서촌에도‘보조국사지팡이 샘’이라고도 부르는 ‘참샘’이 있다. 이처럼 두 샘의 이름이 같은 것은 우연이 아니다. 풍수가 성행했던 시대에 신전마을 사람들이 두 샘을 하나의 맥으로 보아 같은 이름으로 불렀으며, 조계천의 참샘을 신전리 참샘의 모천으로 여기고 있는 것이다. 

우리나라에서 모천과 자천의 관계는 특별히 신전마을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옛날에는 마을의 큰 우물을 신성하게 여겨 물이 줄어들거나 변질되지 않기를 기원하며 정월대보름이면 샘굿을 하는 풍습이 있었다. 이때 모자 관계인 샘은 우물에 금줄을 두르고 먼저 마을의 높은 곳에서 솟고 있는 엄마 샘에서부터 마을의 우물까지 물길을 따라 외로 꼰 새끼줄을 잡고 내려오며 매구(풍물)를 치며 샘물이 마르지(끊이지) 않기를 기원하는 샘굿행사를 하는 풍습이 있었다. 신전마을의 참샘도 모천까지는 직접가지 않았지만 1970년대 초까지 샘굿이 이어졌다고 했다.

신전마을의 참샘은 마을 사람들만 부르는 이름이고, ‘보조국사지팡이 샘’으로 더 많이 알려져 있다. 세상이 변하여 상수도가 놓인 이후(1975년 무렵)로 신전마을 샘굿도 자취를 감추게 되었고, 조계산의 참샘에도 발길이 끊겨 신성을 소원하던 두 참샘의 이야기도 이제는 옛이야기가 되고 말았다.

‘조계천’이란 이름은 선암사가 소장하고 있는 ‘대각국사 중창건도기’에 표기되어 있는 것이 유일하다. 대각국사 중창건도기는 1800년을 전후(1760~1823)하여 제작된 것으로 추정하는 선암사의 사세도이다.   

이처럼 사찰의 사세를 그려놓은 도면에 작은 우물 하나를 표기해 놓은 것은 특별한 의미가 있을 것으로 추정된다. 선암사와 조계천의 관계를 알아보기 위해 선암사에 기거하는 스님들과 선암사 출신 노장님들께 수소문해 보았으나 우물을 기억하는 사람은 더러 있어도 이름까지 기억하는 사람은 없었다.

지리적으로 볼 때 선암사에서 조계천을 사용했을 가능성은 적지만 3000명이 넘는 승려가 있었던 때라면 인지도는 이웃마을에 뒤지지 않았을 것이다. 그래서 절의 사세를 나타내는 지형도를 그릴 때 선암사를 상징하는 주산의 이름을 붙여 ‘조계천’으로 이름지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아울러 조계천이 건도에 표기된 것은 필자가 볼 때 조계천의 위치가 사세의 경계와 이웃하므로 그리는 사람이 마치 ‘至→’와 같이 끝에 뒤편을 알리는 여운의 마무리로 추정된다. 아무튼 ‘대각국사 중창건도기’의 제작시기와 관계없이 조계산의 맑은 샘인 조계천은 수백 년에 걸쳐 주변 마을 사람들과 선암사 스님들의 갈증을 풀어주었던 생명수로서 제몫을 다했을 것이다.

조계천이 명천임을 알려주는 일화로 순천부사에게 매일 이 샘물을 길어다 바쳤다는 얘기가 전해오고 있다. 지금은 조계천이 모두 허물어져 옛 모습을 잃어버린 채 버려져 있어 아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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