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계산은 남도의 명산으로 송광사와 선암사가 있는 불교문화의 중심이며, 순천사람의 주요한 삶의 터전이다. 
순천시 송광면 출신인 김배선 씨는 약 15년 동안 조계산과 그 주변 마을을 누비면서 주민의 이야기를 수집하고 현장을 답사한 자료를 토대로,  ‘조계산에서 만나는 이야기’라는 책을 냈다.
이 책 주요 내용 중 일부를 김배선 씨의 동의를 받아 순천광장신문 독자들과 함께 공유하기 위해 연재한다. 편집국



 

등계봉(登鷄峯)은 조계산의 서북방 끝자락에 솟아오른 560m 높이의 봉우리이다.
 

▲ 김배선 향토사학자

행정구역상으로는 주암면과 송광면(신흥리)이 정상의 줄기를 따라 사이좋게 나뉘었으며, 주암면의 동남에 위치한 접치, 복다, 문길리 등의 여러 마을과 송광면의 오봉, 신흥리가 등계봉의 동북서 삼면을 에워싸고 있다.

많은 사람이 등계봉을 송광사나 신흥마을의 뒷산이라고 부른다. 산의 줄기는 송광사의 배후봉인 시루봉에서 백호줄기를 벗어나 북방으로 뻗어내렸다. 신흥마을에서 접치를 향하는 오두재에서 500m 가량 꺾어 오른 곳에 봉우리를 오뚝 세워 주암면을 향해서는 부드러운 야산으로 산세를 마무리하여 펼쳐진 땅에 주민들이 등계봉을 기대며 살아왔다.
 

▲ 접치에서 바라본 등계봉


주암호가 건설되면서 송광을 향해 새로 난 국도는 그 옛날 송광사에서 거두재를 넘어 신흥과 오봉을 거쳐 신더리재를 넘어 요곡, 장동, 풍교를 지나 주암으로 통행하던 산길이었다. 그래서 지금도 마을마다 송광사와 관련된 전설과 불교의 흔적이 많이 남아 있다.   

최근에 등계봉에서 송광면으로 넘어가는 국도변 장동(신다리) 마을로 펼쳐진 골짜기에 ‘파인힐스골프장’이 들었다.

등계봉은 주암면 방향으로 부드러운 야산의 모양인 것과 달리 남서방인 송광면 신흥마을과 조계산 방향은 골짜기의 형태가 우람한 암벽들과 가파른 경사로 이루어져 악산의 형태이다. 등계봉의 신흥마을 방향 정상 아래는 수좌(지)굴이라는 두개의 암석 굴이 상하 약 100m 간격으로 나란히 있다.

수좌굴에는 오랜 옛날부터 스님과 상좌(시중드는 제자승)에 관한 이야기가 전해 내려오고 있다.  

‘오랜 옛날 등계봉의 윗 굴에서는 스님이 수도를 하고, 아래 굴에서는 상좌가 살며 시중을 들었다. 아래 굴의 작은 구멍에서는 매 끼마다 두 사람이 먹을 만큼의 쌀이 나와 그것으로 공양을 지어 올렸다. 어느 날 상좌가 욕심이 생겨 쌀을 많이 받을 욕심으로 쌀이 나오는 구멍을 막대기(부지깽이)로 쑤셨더니 피가 쏟아지더니 그 뒤로는 영영 쌀이 나오지 않아 스님이 떠나버렸기에 이때부터 수좌(지)굴이라 부르게 되었다’

수좌 굴에는 조선후기에 산적들이 살기도 하였으며, 한국전쟁을 전후해서는 빨치산들이 은신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등계봉에 오르면 주변의 아름다운 경치를 한눈에 볼 수 있다. 남쪽으로는 시루봉과 망수봉으로 이어지는 산줄기가 조계산과 송광사를 그리게 하고, 북쪽 주암벌판에는 올망졸망 인간들의 삶의 자취가 점점이 이어진다.

서쪽으로 고개를 돌리면 모후산 정상과 굽이굽이 주암호의 경관이 한눈에 들어온다.

 

 

소호령봉(742고지)

쌍향수로 유명한 송광사의 천자암 뒤편에 솟아있는 봉우리의 이름이 소호령봉(742고지)이다. 이 봉우리는 송광사의 터를 형성하고 있는 산의 줄기로 구분하면 좌측 청룡 줄기의 어깨에 해당한다.
산세를 보면 주봉인 효령봉(연산봉)에서 시작하여 왼쪽으로 펼쳐진 맥이 송광굴맥이(굴목재)까지는 기운을 낮추다가 이곳에서 다시 약 200m 가량 솟아오르며 봉우리가 되었다.
등산로를 따라 걸어가면 장군봉에서 말발굽 능선을 타고 송광사쪽 주봉인 효령봉(연산봉)을 지나 송광굴목재를 거처 천자암과 송광사 사이로 돌아가는 가장 긴 코스인 천자암과 송광굴목재 사이의 봉우리이다.


742고지 이름의 내력

‘고지’는 군사 용어로서 ‘전략적으로 유리한 높은 곳의 진지’라는 뜻이다.
우리나라에는 한국전쟁 중에 산봉우리에서 작전과 격전을 치르는 동안 군인들이 봉우리의 이름 또는 봉우리의 이름이 없거나 모르는 곳은 높이의 숫자 뒤에 고지라는 단어를 붙여 군사적 용어로 불렀다.

전쟁이 길어지고 북한군이 물러간 이후에도 ‘공비 토벌작전’이 한동안 계속되었다. 당시는 대부분의 남자가 전쟁에 참여했기 때문에 국민들 사이에 군사 용어가 많이 사용되었고, 그 영향이 1960년대까지 이어져 왔다.

그래서 지금도 휴전선에 가까운 산봉우리들은 당시 전투에 참가한 뒤 천행으로 생환한 노병들뿐만 아니라 그 사람들의 손자뻘 되는 초병들도 ×××고지라는 이름을 부르고 있다. 

그러므로 조계산의 742고지는 군사 작전에서 비롯된 이름이며 742는 높이를 말한다. 742고지는 천자암의 뒤편에 솟아있는 봉우리(형태)가 분명하지만 동쪽 건너편 선암사의 백호분기점인 굴목재 정상처럼 봉우리로서 제 이름을 갖지 못했다. 742고지라고 불리기 전까지는 이 봉우리와 가까운 송광면의 이읍, 장안, 산척 등 주변마을 사람들로부터 ‘천자암 뒷산’ 혹은 ‘천자암 뒷몬당’으로 불렸다. 그러다 1952년 조계산 공비 토벌 작전을 펼칠 때 742고지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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