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정우
순천민들레하나한의원
원장

퇴계 이황의 매화 사랑은 유별났다. 예부터 매화를 찬미한 사람은 많았지만, 유언으로 ‘매화 분에 물 잘 주라’고 당부한 이는 퇴계 말고 난 알지 못한다. 또 오직 매화를 주제로 시집을 낸 이를 퇴계 외에는 알지 못한다. 퇴계는 <매화>라는 시에서 자기 마음을 이렇게 노래했다.

찬바람 서리에 쉬이 얼까 두렵지 않네
다만
따뜻한 봄 맞아 꽃잎 떨어질까 걱정이네

매실나무는 한겨울의 추위를 견디며 꽃망울을 숨기고 있다. 찬바람과 서리가 작은 틈새로 공격할까 노심초사다. 고개를 처박고 어깨를 웅크리며 빈틈없이 버텨낸다. 어찌 보면 이건 어렵지 않은 듯하니, 자기 자리만 고수하면 되고, 수동적 상황이 주는 관성의 힘도 보태니 한번 해볼 만하다. 이렇듯 외부의 악조건은 두려움의 대상이 아니고 버팀의 대상이다.

하지만 봄이 오면 상황은 달라진다. 겨울 공기 속으로 봄의 바람이 한 줄 한 줄 스며들어오며, 차츰차츰 봄바람이 겨울 냉기보다 많아지는데, 슬금슬금 걱정이 솟아난다. 스며드는 봄을 막을 재간이 없다. 한겨울 매섭고 세찬 바람에 꽃잎은 떨어지지 않지만, 살랑거리는 봄바람에 매화 꽃잎은 슬렁슬렁 맥없이 떨어져 버린다.
 

▲ 매화, 봄에 흩어지다


퇴계는 혹독한 시련의 계절이 아니라 따뜻한 방만의 계절을 경계한 것은 아닐까? 매화를 빗대 인간사를 걱정한 것을 아닐까? 매서운 겨울을 이기기 위해 몸을 감싸 서로를 붙잡던 날은 두렵지 않다. 겨울 지나 봄이 오면 떨어지는 꽃잎처럼, 같은 마음으로 함께 꿈꿨던 사람들이 흩어지는 날, 그날을 걱정한 게 틀림없다.

촛불이 흩어질 조짐이다. 흩어지고 말고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흩어질 때 흩어지더라도 촛불의 본질은 가슴에 담고 흩어지는 것이 중요하다. ‘이것이 나라냐’로 축약되는 촛불 민심은 ‘돈이 지배하는 세상’에 대한 항거였다. 돈이 지배하는 ‘헬조선’의 꼭대기에 재벌이 있다. 가장 밑바닥에는 비정규직 노동자와 하루가 다르게 사라지는 농민이 있다. 수레의 두 바퀴와 같은 재벌 해체와 노동의 민주화는 촛불의 핵심이다. 핵심을 놓친 사례를 우리는 알고 있다.

2004년 탄핵국면에서 노무현을 지켰던 촛불은 배신당했다. 촛불은 17대 총선에서 과반 당선으로 노무현 정권에 힘을 실어주었지만, 대연정을 제안하고 한미FTA로 치달으면서 그들로부터 배신당했다. 시대적 과제의 발현태인 촛불의 마음을 망각한다면, 어떤 정권이든지 배신자의 오명을 벗을 수 없다.

우수 지나 봄비 내리는 날, 매화의 지조를 달리 생각한다.

순천민들레하나한의원 원장 이정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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