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상훈 여수YMCA 사무총장

짙은 안개 속에 싸이면 한치 앞도 보이지 않는다. 차를 운전할 때는 난감해진다. 그렇다고 멈춰서 있을 수도 없으니 어떻게든 조심스럽게 빠져나가려 애쓴다. 이럴 때 작동하는 것이 예측이다. 평소 아는 길이면 기억을 살리고 초행길이면 지나온 방향감각을 동원해 더듬더듬 빠져나가다 보면 안개가 걷히게 마련이다.

한치 앞도 보이지 않는 혼란은 세상살이에서도 종종 닥친다. 천재지변이나 정변이 일어날 때 그렇다. 홍수나 가뭄, 대형 붕괴사고와 같은 천재지변은 그나마 모두가 같은 피해자니 단합해 대응이라도 한다. 쿠데타나 독재와 같은 정변은 피아를 갈라 죽이고 살리는 피바람을 일으켜 시대와 역사를 암울에 빠트린다.

정유년 새해를 우리 사회는 또 다시 한치 앞도 내다볼 수 없는 격변 속에서 맞았다. 박근혜 국정농단 4년 끝에 탄핵 철퇴를 맞았으니 물러나는 것은 시간문제 아니겠냐 했는데, 그것이 전부가 아니라는데 문제가 있다.

박근혜의 4년은 56년 전 박정희의 쿠데타정변에 뿌리를 둔 한줄기 가지일 뿐이다. 그 뿌리에서 성장한 군사독재와 개발독재, 재벌독점과 수구 기득권 독점이 기둥과 줄기를 이루고 마침내 박근혜라는 독이 든 꽃을 피운 것이다.

그러므로 새해 천만 촛불이 해야 할 일은 이 꽃 한 송이 제거하는 것이 전부가 아니다. 기둥과 줄기, 나아가 박정희 신화 또는 망령이라는 뿌리까지 뽑아내 청산하는 일, 그리고 그 자리에 민주와 정의, 평화통일, 인본주의적 가치의 나무를 새로 심는 일까지가 촛불의 힘으로 해야 할 일이다.

몇몇 선각자들만의 주장이 아닌 새로운 체제를 만들어야 한다는 사회적 공감대는 지난 서너 달의 촛불탄핵정국에서 온 국민의 열망으로 타올랐다. 이에 자극받은 정치권도 하나같이 이 시대적 소명을 받아 실천하겠다고 앞 다퉈 공언했다.

그런데 새해 들어 분위기가 조금 이상하게 변해가고 있다. 깊게 살필 것 없이 원인은 대통령선거 국면이다. 특검의 활약으로 헌법재판소의 조기 탄핵결정 움직임이 기정사실화되자 각 정당과 후보가 본격적인 선거체제로 돌입해가면서 드러난 현상이다.

물론 사상 초유의 탄핵으로 인한 급작스런 선거에 정권획득을 목표로 하는 정당이 마냥 관망만 하고 있으라는 것은 아니다. 문제는 어떤 선거냐 하는 데 있다. 표 많이 얻어 당선되는 것이 평상시 선거에서 제일이라고 한다면 올해의 비상한 선거의 제일 과제는 체제변혁이다. 대통령이 되기 위한 선거가 아닌 체제를 어떻게 변혁시킬 것인지 국민에게 묻고 답하는 선거여야 한다는 것이다.

지금 국민들은 광장에 있다. 여전히 추운 밤 촛불을 들고 간절한 한마음으로 외치고 있다. 정권에 빌붙어 부역한 관료도, 정경유착과 부정으로 거대한 부를 쌓은 재벌도, 그리고 우리 생활문화 곳곳에 스며든 우리 안의 박근혜 최순실도 모두 청산하고, 사람들이 마음 놓고 살 수 있는 새 세상을 만들어야한다고 외치고 있다.

각 정당과 후보들은 이 외침에 귀 기울이고, 그에 가장 합당하고 겸허한 답을 내놓고 다시 국민들의 판단과 선택을 기다려야한다. 대세론이니, 빅텐트니, 스몰텐트니 하는 정치공학에 몰두하느라 정작 이 외침을 외면한다면 이제는 그들의 한치 앞이 어떻게 될지 모를 일이다.

악질 일제부역자는 훗날 심판대에 서서 이렇게 말했다. 설마 해방이 될 줄 알았겠냐고. 알았으면 그랬겠냐고. 지금 정치권이 해야 할 가장 기본적인 것은 한치 앞이라도 바로보고 국민요구에 순응하는 체제개혁과제를 찾아 실행하는 것이다. 그것이 대선승리의 첩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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