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형근혜
더드림실버타운 대표

대한민국의 아름다움을 표현할 때 ‘사계절이 뚜렷한 나라’라는 말을 자주 쓴다. 일년 내내 비슷한 날씨가 계속되는 나라를 다녀올 때면 변화무쌍한 사계절이 있는 우리나라가 얼마나 좋은지 새삼 감사한 마음까지 든다. 그러나 겨울을 앞둔 요즘 생각이 많아진다. 안 그래도 어려운 살림에 겨울 난방비를 감당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이 겨울이 얼마나 잔일한 시간일지….

83세의 인수님(가명)은 강원도 원주에서 평생을 사셨던 분이다. 자녀가 모두 떠나고 홀로 살던 인수님은 겨울동안 보일러가 얼지 않을 정도로만 온도를 맞춰놓고 살았다. 겨울이 오기 전 아들이 와서 기름을 넣어주고 갔지만 따뜻하게 보일러를 돌렸다가는 겨울이 절반도 지나기 전에 바닥이 나버리기 때문에 아껴 써야 한다.

“그래도 나는 자식들이 기름이라도 넣어주고 가지. 그도 없는 사람은 그냥 냉골에서 전기장판 갖고 버티는 거여”

홀로 사는 노인세대를 방문해보면 생각보다 많은 노인들이 보일러를 틀지 않고 생활한다. 인수님이 복지시설에 오게 된 이야기를 들어보면 노인들의 겨울나기가 녹녹치 않음을 알 수 있다.

겨울 내내 눈이 녹지 않는 강원도의 추위는 순천과 비교할 수가 없다. 눈이 많이 내린 어느 날, 마을 회관에서 추위를 녹이며 소주를 몇 잔 마신 인수님은 그날의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 혼자 사는 집이 휑하기도 하지만 추운 방에 혼자 있는 게 싫어 주로 마을 회관에서 시간을 보내곤 했는데 집에 가서 취기를 빌어 얼른 자야겠다 싶어 그날 소주를 과하게 먹었던 모양이다. 비틀거리며 집 앞에 도착했는데 아무리 열쇠를 꽂아 문을 열려고 해도 열리지 않았다. 몇 번 더 눈을 부릅뜨고 열쇠를 돌려보는데 도무지 열리지 않자 혼자 욕을 하던 기억을 마지막으로 잠이 들었는지 그 이후 기억은 없다고 한다. 눈을 떠보니 병원이었고, 3개월 정도의 시간이 훌쩍 지나 있었다. 나중에 이야기를 들어보니 앞집 사는 할머니가 개 짖는 소리가 하도 시끄럽게 계속 들려 나와 봤는데, 할아버지가 앉은 자세로 문을 잡고 잠이 들어있더라는 것이다. 놀란 할머니가 할어버지를 잡고 흔들자 그대로 쓰러졌고, 이장을 불러와 구급차가 오고 병원으로 옮겨졌다고 한다.

“그때, 앞집 할머니 아니었으면 난 이 세상사람 아니지. 얼매나 고마운지 몰러. 내가 퇴원하고 아들 옆에 산다고 이쪽으로 내려와 버려서 그 할머니한테 고맙다고 말도 못했어. 살아는  있는가 몰러”

인수님은 눈가가 촉촉해지며 옅은 미소를 지었다. 더 건강해지면 아들한테 얘기해서 고향에 다녀오고 싶다며 운동도 열심히 하고 식사도 맛있게 드신다. 인수님의 바람이 꼭 이루어지면 좋겠다.

월동준비에 한창인 요즘, 주변에서 연탄배달 봉사를 하는 사람들, 김장나누기 봉사를 하는 사람들, 라면이나 쌀을 나누는 사람을 만나게 된다. 시국은 어수선하고 살기 어렵다고 모두들 한숨을 쉬는 요즘, 나는 이런 분들에게서 우리나라 국민이 얼마나 훌륭한 사람들인지 새삼 느낀다. 100만 명의 시위대가 모인 집회에서 우리 국민이 보여준 시민의식을 보고 가슴이 뭉클해지고, 나 살기도 바쁜데 주변의 어려운 사람을 돌아보며 힘들수록 함께 손잡고 천천히 발걸음을 옮기는 평범한 이웃들이 있어 좋다.

그래서 우리 아이들은 지금보다 더 좋은 세상, 더 정의롭고 아름다운 세상에서 살아갈 수 있을 것이라 믿는다.

어느 에이즈 환자가 쓴 글에 ‘내게 필요한 것은 사람’이란 시가 있다. 죽음이 한발한발 다가오는 순간에 가장 필요한 것은 함께 밥을 먹고 안아주고 잠들어 줄 사람일 뿐이라는 시처럼 추워지는 요즘 시골에 홀로 사는 내 부모의 보일러 기름을 챙기고 김장도 담은 후에는 주위를 한번 둘러봤으면 좋겠다. 위험한 겨울이 따뜻해지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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