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공학섭
대대교회 목사
소노 아야코의『사람으로부터 편안해지는 법』이란 책에 ‘장례식은 가족행사다’ 라는 소제목의 글이 있다. 일본인 의사 히노하라 시게아키의 강연을 인용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노인이 임종 때 금해야 할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점적(点(滴)이다. 점적이란 코에 관을 주입하여 음식물이나 영양분을 공급하는 것을 말하는데, 점적은 생체 균형을 무너뜨린다. 안 먹으면 안 먹은 대로 우리 몸의 구조는 어떻게든 그 상태에 적응하면서 살아가게 되어 있지만, 점적은 그런 구조를 강제로 무너뜨린다. 점적을 하면 ‘세포가 물에 흠뻑 잠긴 상태가 되어’ 호흡조차 힘들어지는 경우도 있다. 예외적으로 점적이 필요한 경우가 있긴 하지만 하지 않는 게 바람직하다고 권한다.

또 하나는 기도 절개다. 기도절개는 임종 때 말을 못하게 한다. 사람은 죽을 때까지 의사표현이 가능한 상태로 있어야 한다. 가족들에게 미안하다, 고맙다, 사랑한다는 말을 할 수 있는 기회를 박탈하면 안 된다. 죽음은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그러므로 죽음은 자연스러워야 한다. 죽음을 준비하기 위해 먹기 싫어하는 것을 코로 줄을 넣어 먹이는 것도 억지스럽다. 죽음을 위해 숨을 거칠 게 쉬는데 기도절개를 하여 숨통을 뚫는 것도 부자연스럽다. 의사의 적절한 판단이 필요하긴 하지만 이 두 가지는 가족들의 결정에 의해서 실행한다. 대부분의 가족은 기도 절개를 해서라도 생명 연장에 동의한다. 그렇게 하는 게 가족의 도리라고 여기기 때문이다.
 
고령사회에서 노부모의 임종은 발등에 떨어진 불이다. 임종을 어디에서 맞이하는 게 좋을까? 이는 시대적인 유행이나 편의주의적 발상으로 해결할 일이 아니다. 건전한 도덕적 가치와 우리사회의 미풍양속을 해치지 않아야 한다. 기본 전제가 노인의 임종은 평소에 살던 자신의 집에서 가족의 품에서 한다는 원칙을 가져야 한다.

얼마 전만 해도 병원에서 투병을 하다가도 임종은 집에서 맞이하는 것이 보편적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 반대가 되었다. 집에 있다가도 임종이 가까우면 병원으로 간다. 언제부터인가 병원이 인생의 종착역이 되었다. 집에서 죽는 죽음은 시대에 뒤떨어진 일이 되었고, 불편한 일로 여기게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노인의 임종만큼은 집이어야 한다. 이 세대를 거스르는 말 같지만 집에서 가족의 품에서 임종하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이다. 물론 통증이 빈번한 말기 암 환자들의 경우는 예외적으로 호스피스 병상을 이용할 수 있다. 그러나 호스피스 병상만으로 해결책이 되지 못한다. 비용도 만만치 않고 이용시설도 턱없이 부족하다.

마침 반가운 소식이 들려온다. 정부에서 자택 임종과 가정 호스피스 확대를 계획하고 있다는 것이다. 가정 호스피스는 말기 환자가 익숙한 자신의 집에서 돌봄 서비스를 받는 것으로 여러 모로 이점이 많다. 병원에 있는 것과 다를 바 없는 진료 및 간호 서비스에 간병 지원까지 저렴한 비용으로 받을 수 있고, 덤으로 호스피스 병상부족 문제를 해결하고, 막대한 건강보험 지출을 줄일 수 있으니 좋다. 가정 호스피스 제도가 어서 빨리 정착이 되었으면 좋겠다.

임종은 내 집에서 가족들의 따뜻한 품에서 할 수 있어야 한다. 하얀 가운을 입은 낯선 의료진에 둘러싸여 죽음을 맞는 일은 행복한 죽음이 아니다. 내 가족이 지켜보는 중에 맞는 게 자연스럽다. 자연스러운 임종을 위하여 먼저 가족이 임종에 대한 건전한 가치를 가지고 있어야 한다. 생명연장을 위한 장치에 대하여 가족들이 결정하기가 곤란할 때가 있다. 다급한 상황에서 생명연장 장치를 하지 않으면 불효자가 되고 죽음을 바라는 사람으로 오해 받기 쉽다. 이를 예방하기 위해 사전에 가족과 건전한 합의를 해두어야 한다. 무엇보다도 이 두 가지 삽관과 기도절개는 본인이 하지 말도록 유언해 두는 것이 더 바람직한 일이다. 자연스러운 죽음을 맞이하기 위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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