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백종삼
순천시영상미디어센터 사무국장
재벌이란 말은 같은 마을에 사는 부호를 뜻하는 일본의 ‘자이바츠(財閥)’에서 유래됐다. 동향 출신의 사업가를 가리키던 자이바츠는 메이지유신을 거쳐 1900년 전후로 등장한 거대한 자본가 집단을 지칭하게 되는데, 이때 등장한 대표적인 자이바츠가 미쓰비시와 미쓰이, 스미토모 같은 전범기업들이다. 자이바츠들은 태평양전쟁의 원인을 제공하고 군수물자 조달을 통해 적극적으로 전쟁을 수행했다는 죄목으로 연합군 최고사령부에 의해 해체된다.

일본의 재벌이 미군이 중심이 된 연합군 최고사령부에 의해 해체된데 반해, 우리나라 재벌은 아이러니하게도 미군정하에서 출발했다. 해방과 함께 일본인이 남기고 간 막대한 재산은 적국이 남긴 재산이란 뜻으로 ‘적산’이라 불렸는데, 미군정은 1947년부터 이 적산을 불하했다. 그때 불하한 적산의 정확한 가치를 알 순 없지만, 당시 조선경제의 80%가 적산기업에서 나왔다는 걸 감안하면 막대한 규모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인수자들은 총 비용의 10%만 지불하고 나머지는 15년 안에 갚으면 되었는데, 해방 이후 극심한 인플레이션을 고려하면 그 이득은 상상을 초월하는 금액이었을 것이다. 현재 우리나라 30대 재벌 대부분이 그 혜택을 받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적산불하 때는 필연적으로 원료 수입면허나 저금리 대출, 세금감면, 특혜환률 등이 수반됐다. 인수자들은 정치인 및 관료들과 공생관계를 형성하면서 뇌물과 특혜를 주고받는 정경유착을 통해 미래산업을 선점할 수 있었다. 특히 한국전쟁 이후 미국이 제공한 거대한 원조물자와 자금은 그동안 구축된 인적 네트워크를 통해 재벌들에게 흘러 들어갔으며, 해외에서 물자를 수입할 수 있는 허가권과 국내시장에서의 독점적 지위까지 안겨주었다.

대기업 위주의 수출경제정책을 표방한 군사정부는 외자도입과 지급보증제도 등 금융특혜를 베풀어 재벌의 성장을 이끌었다. 그러나 대량의 외자와 급증한 현금차관은 기업의 재무건전성을 악화시키고 부실기업을 양산했다. 여기에 베트남전쟁의 여파로 심화된 미국의 재정위기는 세계적인 인플레이션을 야기했고, 이를 해결하기 위해 IMF가 은행대출을 억제하자 국내 금융시장은 경색됐으며 기업의 사채 의존도가 높아졌다. 도산위기에 몰린 기업을 구하기 위해 정부는 모든 사채를 3년 거치 5년 분할 상환으로 동결하거나 출자 전환하고, 금융기관이 특별금융채권을 발행하여 기업의 고리대출금 일부를 장기저리대출로 대환해주게 된다. 부실기업을 건전화시키겠다는 명목으로 사적 소유권과 시장 질서를 무력화시키면서까지 재벌의 손을 들어준 이 조치는, 이후 몸집만 키우면 무슨 짓을 해도 정부가 해결해주는 선례를 남겨 재벌의 도덕적 해이를 불러오고, 정부의 비호아래 급격하게 계열사를 확장해 오늘날의 재벌로 성장하는 계기가 됐다.

이처럼 역대 정부의 특혜와 국민의 희생을 바탕으로 성장한 한국 재벌의 현주소는 참담한 수준이다. 비자금 조성과 분식회계, 탈세와 횡령 등의 불법을 저질러 총수가 구속되기 일쑤이고, 내부거래를 통해 재벌가의 재산을 늘려주고, 편법을 동원해 2세에게 경영권을 물려준다. 중소기업의 특허와 아이디어를 훔치고, 실적을 위해 하청업체에 대한 납품단가 후려치기를 자행하며, 골목상권에 진입해 서민들의 밥그릇을 빼앗고, 온갖 갑질로 국민의 지탄을 받고 있다.

얼마 전 한 재벌그룹의 2인자가 총수 일가의 비리에 관련된 검찰수사를 앞두고 자살했다. 그의 죽음은 안타깝지만 이로 인해 재벌가에 대한 수사가 흐지부지 되는 것은 아닌지 염려된다. 그동안 재벌이 국가 경제발전에 기여한 공로를 모르는 것은 아니지만, 오늘날 우리사회가 직면한 구조적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사회 전 영역에 걸쳐 강력한 영향력을 미치는 재벌에 대한 개혁이 반드시 필요하기 때문이다. 한진해운 사태에서 보듯 재벌의 잘못은 막대한 국부의 손실을 초래한다. 재벌은 이제라도 그 영향력에 걸 맞는 사회적 책임의식을 회복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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