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강칼럼_삶 그리고 죽음


 
▲ 이정우
민들레하나한의원
원장
지리산은 뭔가 있다. 한국 현대사의 숨길 수 없는 애환을 담고 있는 지리산. 지리산에 가자는 친구의 말을 듣자마자 묘한 끌림과 ‘그래, 종주는 이게 마지막이 될지도 모르지!’라는 조급함마저 일었다. 30년 만에 보는 친구의 얼굴만큼 지리산의 모습도 그리웠다.

출퇴근을 걸어서 하기에 걷는 것은 자신 있지만, 지리산이 갖는 무게에 10일 전부터 하체 단련 운동을 했다. 일주일 전부터 일기예보를 들여다봤다. 우중충한 장마를 넘어 태풍이 온다 했다. 친구들은 이틀 전부터 비와 바람을 몰아내는 기운을 지리산으로 보내자며 부산했다.

의신 마을은 구름이 겹겹이다. 비도 제법 떨어진다. 강화도에서부터 서울, 대전, 천안삼거리를 거쳐 구례를 돌아 먼 길 달려 친구들이 왔다. 익숙한 얼굴이다. 무슨 별일 있었냐는 듯 서로 웃는다. 저녁상을 받으니 짙푸른 하늘을 덮은 구름, 계곡 물소리, 산채, 농어회 때문에 고량주와 막걸리가 모자랐다. 지리산 기타선생님의 흥겨운 노래를 뒤로하고, ‘그래도 여기가 지리산인데, 빨리 자자’는 한마디에 하나둘 누웠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새벽 세시에 일어나니 어제의 비는 이미 저만큼 가 있었다. 삼정에서 출발이다. 예기치 않게 등산길이 아닌 빨치산 길로 들었다. 안내판이나 리본이 하나도 없다. 이현상의 최후 격전지를 비켜 길 아닌 길을 오른다. 선배 한 분이 힘들어한다. 잠시 쉬면 괜찮아질 테니 먼저 가란다. 친구 한 명을 붙이고 오르다 설마, 하는 마음에 다시 내려갔다. 얼굴이 하얗다. 가슴이 뛰고 어지럽단다. 침을 놓고 자리를 펴 눕혔다. 얼마 지나지 않아 기운을 차린 듯 무슨 일 있었냐는 듯 걷는다. 발이 가벼워 보여 안심이다. 산수국, 비비추, 박쥐나무 꽃을 지나 불어난 물이 넘실대는 계곡을 끼고, 가장 마지막으로 벽소령에 올랐다.

구름을 아래에 두고 먹는 산상 라면은 달다. 같이 오르던 비구름에서 내리는 빗방울이 거세졌다. 비를 뚫고 세석산장에 도착하니 친구들은 벌써 천왕봉으로 달려갔단다. 야속했다.

전투식량으로 배를 든든하게 채우고 가장 나중에 거림으로 하산한다. 빗줄기가 매섭게 친다. 불어난 계곡 물은 거침이 없다. 불안하다. 하산길을 자르듯 냇물이 흐른다. 다시 또 냇물을 만났다. 발을 디디니 생각 없이 쑥 빠진다. 손을 내밀었다. 다리에 힘이 빠져 한 발 내딛기가 버거운 여자 선배다. 물줄기가 하나 더 내려오면 중심을 잃을지도 모른다 생각하니 오싹해진다. 앞으로 몇 개의 개울이 있는지도 모른다. 내려갈수록 물이 깊을 수 있다. 여자 선배는 쉬는 시간이 잦아진다. 비는 잦아들지 않는다. 해는 가리어졌고 곧 어둠이 온다. 옆에서 흐르는 계곡 물소리가 참 요란하다. 이대로는 안 되겠다. 119로 전화했다. 한두 시간 걸린단다. 큰 숨을 내뱉는다.

순천민들레하나한의원 원장 이정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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