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계산은 남도의 명산으로 송광사와 선암사가 있는 불교문화의 중심이며, 순천사람의 주요한 삶의 터전이다. 
순천시 송광면 출신인 김배선 씨는 약 15년 동안 조계산과 그 주변 마을을 누비면서 주민의 이야기를 수집하고 현장을 답사한 자료를 토대로,  ‘조계산에서 만나는 이야기’라는 책을 냈다.
이 책 주요 내용 중 일부를 김배선 씨의 동의를 받아 순천광장신문 독자들과 함께 공유하기 위해 연재한다. 편집국



▲ 장군봉 정상
▲ 장군봉 정상의 표석

▲ 김배선 향토사학자
조계산 정상인 장군봉에 오르면 정수리에 솟아 있는 바위를 딛고 정상 표석이 동쪽을 향해 우뚝 서있다. 타원형인 흑갈색의 묵석 앞면에는 ‘曺溪山 將軍峰 884m’, 뒷면에는 작은 글씨로 ‘1990. 12. 16 농협승주(군)지부 산악회’라고 새겨져 있다. 도립공원 조계산의 정상에 표석 하나 없는 것을 아쉬워하던 주민들, 특히 산악인의 마음을 대신하여 ‘농협 승주지부’ 산악회원들이 정성을 모아 표석을 세운 것이다.

처음 표석을 세울 때 결정은 쉽게 했지만 조계산 정상의 품격에 걸 맞는 작품을 구상하자니 쉽지가 않았다. 전국의 명산에 있는 표석을 떠올려 보았지만 국가기관이나 유력단체에서 충분한 예산의 뒷받침을 받아 세우는 것이 아니면 석재 공장에서 손쉽게 제작한 소형 입석이 대부분이었다. 교통 여건상 많은 예산을 들여 현지에서 제작하거나 헬기 등 특수 장비를 동원하지 않고는 운반이 쉽지 않기 때문이다.

조계산 장군봉 표지석을 세운 이들도 예산이나 교통여건 등 모든 조건이 소형 입석을 세울 수밖에 없는 형편이었다. 하지만 처음으로 세우는 조계산 정상의 상징물을 그렇게 할 수 없다는 회원들의 요구에 따라 자연석으로 제작하기로 의견을 모았다.

하지만 예산이 많이 필요하고, 재료(자연석)를 확보하는 것도 쉽지가 않았다. 하지만 지부장을 포함한 산악회의 모든 회원들이 발 벗고 나섰다. 석재는 송광천에서 묵석을 채취하였고 글씨도 서예가의 도움을 받았다. 제작(조각)은 낙안의 석재공장에서 해주었다. 쉽지 않은 조건에서 힘들여 표지석을 제작한 회원들은 설치를 앞두고 모두 들떠 있었다.

조계산의 산세를 잘 알고 있는 산악회 회원들이었기에 설치하는 것은 어렵지 않게 생각했다. 표석(90kg)과 좌대(120kg)를 임도가 나있는 장안재 중간까지 자동차로 운반하고, 그곳에서부터 호남정맥 구간인 고동산에서 올라오는 능선을 따라 굴맥이를 거쳐 정상까지는 인부들이 운반하기로 하고, 목도인부 6명(2인 1조×2, 1조는 교대 조)과 계약까지 마쳤다.

날짜를 맞춰 자동차로 운반하는 임도가 끝나는 지점에서부터 인부들이 표석과 좌대를 운반하기 시작했다. 힘들게 능선까지 메고 온 인부들이 더 이상은 못하겠다고 손을 들고 말았다. 길이 좁고 험해 두 사람이 메기도 힘들고, 네 사람이 멜 수도 없었던 것이다. 그곳에서 정상까지는 등산객들도 한 시간 반이 걸리는 능선과 오르막길이다.

작업은 중단되었고, 특수 장비를 동원하지 않으면 불가능한 상황이었다. 산상 회의를 하고, 농협 지부장이 직접 현지로 와서 의논을 했다. 우여곡절 끝에 지게로 운반하는 것이 불가능할 것이라 생각하면서도 혹시나 하는 기대로 ‘조계산 보리밥집’ 주인에게 도움을 요청하기로 했다. 한평생을 산속에서 지게질로 뼈가 굵은 사람이라는 이야기를 들었기 때문이다.

간곡한 부탁 끝에 아랫마을에 사는 동생과 함께 운반해 보겠다는 약속을 받았다. 물론 여섯 사람에게 치르기로 했던 금액을 주기로 했지만 돈이 문제가 아니라 조계산을 위한 봉사에 동참하기 위해 결심했다고 했다. 다행이었다. 

다음날 이른 아침부터 운반이 시작되었다. 작은굴맥이까지 가는 동안 지게의 가지가 부러지는 어려움을 겪으면서, 네 시간 이상의 고투 끝에 작은굴맥이까지 운반하였다. 그러나 여기서 부터가 문제였다. 등산객들 걸음으로도 30분 거리인 가파른 오르막길은 밧줄로 메달아 끌어 올려도 수많은 사람이 동원되어야 할 터였다. 그런데 120kg의 돌을 지게에 지고 오른다는 것은 상상하기조차 어려운 일이었다.

실제로 좌대를 지고 올라 갈 때는 몇 걸음을 가다 멈추고, 또 몇걸음을 가다가 쉬기를 반복했다. 안타까움 속에 격려하며 뒤따르는 회원들의 다리에도 헛힘이 실리고, 침이 말랐으며, 인간의 한계를 보는 듯하였다.

그런 우여곡절 끝에 1990년 12월 16일 오후, 조계산 정상에서는 아름다운 사람들의 우렁찬 애국가와 만세 삼창이 쌀쌀한 바람을 타고 멀리멀리 울려 퍼졌다.

▲ 선암사 마애여래입상

조계산 장군봉 표지석과는 다른 의미가 있는 게 있다. 선암사 마애여래입상이다. 선암사의 마애여래 입상은 조계산에 있는 유일한 마애여래입상이다.

마애여래입상은 선암사 입구 삼인당에서 대각암(장군봉) 길을 따라 120m 정도를 올라가면 왼쪽으로 작은 공터의 건너편 바위벽에 음각되어 있다. 온화한 표정의 마애여래입상이 지나가는 사람들을 굽어보고 있다.

수직 사각의 평평한 바위 앞면에 가느다란 선으로 부드럽게 음각한 이 마애여래상은 전라남도문화재 제157호로 지정되어 있는 전남지역에서는 가장 큰 평면 선각의 마애불이다.

인상에서는 이국적인 풍모가 느껴지며, 앞가슴에는 커다랗게 ‘卍’ 자가 새겨져 있다. 가까이 다가가서 살펴보면 불상 아래쪽에 갑진삼월 일(甲辰三月日)이라고 새겨져 있으나 연호가 없어 조성 연대를 알 수 없는 것이 아쉽다

사진에서도 구별할 수 있는 것처럼 마애여래상 얼굴의 왼쪽 눈과 입술을 어느 지각없는 사람이 고의로 훼손시켜서, 보기가 매우 민망하고 불편하다.

1994년 가을로 기억된다. 몇 개월 전 보았을 때만 해도 깨끗했던 얼굴이 흉하게 훼손되어 울상 짖는 모습으로 변해 있었다. 조성 연대를 알 수 없는 것도 아쉬운데, 문화재를 훼손해서 더 안타깝게 되었다. 문화재가 가치를 가지려면 그 자체로 잘 보전하여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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