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계산은 남도의 명산으로 송광사와 선암사가 있는 불교문화의 중심이며, 순천사람의 주요한 삶의 터전이다. 
순천시 송광면 출신인 김배선 씨는 약 15년 동안 조계산과 그 주변 마을을 누비면서 주민의 이야기를 수집하고 현장을 답사한 자료를 토대로,  ‘조계산에서 만나는 이야기’라는 책을 냈다.
이 책 주요 내용 중 일부를 김배선 씨의 동의를 받아 순천광장신문 독자들과 함께 공유하기 위해 연재한다. 편집국




선암사의 무우전과 칠전 사이에 있는 600년 홍매길을 지나 운수암(북암)으로 오르는 후문이 있다. 이 길을 나서면 왼쪽 산비탈에 석축을 쌓은 대지(臺地) 위에 웅장한 모습의 석비 2기가 나란히 거북등을 타고 동쪽을 향해 서 있다.

▲ 선암사의 중수비와 사적비. 중수비는 1707년, 사적비는 1921년에 각각 세웠다.

왼쪽의 큰 비가 1707년(숙종33년)에 세운 ‘선암사 중수비’(전라남도 유형문화재 제92호)이고, 오른쪽의 작은 비가 1921년에 세운 ‘선암사 사적비’이다. 사적비는 중수비를 모본으로 하고 있다고 전한다.

두 비(碑)를 비교해보면 재질은 모두 화강암으로 거북등(龜趺) 위의 비좌(碑座)에 비신(碑身)을 세우고, 쌍룡이 어우러지게 새긴 전통양식의 머릿돌 이수(螭首)를 올렸다. 형태를 보면 좌대인 귀부(龜趺)는 닮은꼴을 하고 있지만, 비신의 크기는 중수비의 높이가 502cm이고, 사적비는 높이가 309cm이다. 중수비와 사적비는 크기와 조각기법에서도 차이가 난다. 조각기법을 보면 중수비는 두 마리의 용이 서로 머리를 맞대고 몸을 꼬아 용트림 하는 모습을 실감 있게 평면 돋을 새김한 반면 사적비는 머리를 나란히 앞으로 내민 상태로 몸통을 휘감아 실물처럼 생동감 넘치는 교룡으로 부조(浮彫)와 환조(丸彫)에 가깝게 조각하였다. 중수비와 사적비가 다른 조각기법을 취하고 있다는 것이다. 

 
‘중수비’는 선암사가 정유재란(1597년) 때 왜병의 방화로 문수전 조계문 동쪽 변소 등 세 개의 건물을 제외하고 모두 불 타 버린 선암사를 경준, 경잠, 문정이 8년(1660년~1668년)에 걸쳐 미륵전 옛터에 대법전(현 대웅전)을 세우는 등 한차례 중창한 뒤 호암 약휴대사가 중심이 되어 1698년부터 1707년까지 9년 동안 두 번째 중창을 마쳤다. 화재로부터 110년이 지난 뒤에야 복원이 완료되었고, 보물 400호 승선교도 이때 완공하였다. 이와 같은 각고의 대불사를 기록으로 남기기 위해 1707년 6월에 ‘조계산 선암사 중수비’를 세운 것이다.  비문은 채팽윤(蔡彭胤)이 짓고, 이진휴(李震休)가 썼다.

비문의 앞쪽 상단에 전서(篆書)로 ‘조계산 선암사 중수비’(曹溪山仙巖寺重修碑)라 이름을 새겼고, 오른쪽 서두에 ‘승평부 조계산 선암사 중수비 명병서’(昇平府曹溪山仙巖寺中修碑銘幷書)는 제목을 해서체로 새겼으며, 선암사의 약력과 함께 정유재란 이후의 중창내용을 자세하게 기록하고 있다.

‘선암사 사적비’는 중수비보다 214년 후인 1921년에 계음(桂陰) 호연(浩然)의 ‘조계산 선암사 사적’을 내용으로 건립한 비이다. 도선국사 창건으로부터 당시까지의 선암사에 관한 간추린 사적이 새겨져 있다.

비석 앞쪽 상단에 비명이 있고, 오른쪽 면에는 건립연대가 불기 2948년 겨울임을 알려주는 ‘세존응화 2948년 신유계동립’(世尊應和二九四八年辛酉季冬立)이라는 명문이 있다.

선암사는 천년이 넘는 유구한 역사에도 불구하고 거듭되는 대형 화재로 인한 소실의 수난이 반복되어 1700년대 이전의 기록물은 거의 보전되지 않았다. 그래서 ‘선암사 중수비’의 비명(1707년)과 ‘선암사 사적비명’이 선암사의 중요한 기록이 되고 있다. 

중수비가 자리한 곳은 풍수지리 때문이라는 알려지지 않은 일화가 있다. 중수비가 서있는 위치를 곰곰이 살펴보면 여느 절과는 다른 점이 발견된다. 보통의 경우 중수비나 사적비, 공덕비 등은 사람이 가장 잘 볼 수 있는 곳에 설치한다. 절이나 관서(마을) 입구 측의 대로변에 세우는 것이 상식이다. 그렇게 보면 선암사의 정문 길인 동부도전에서 일주문 사이의 어느 곳에 세우는 것이 좋을 것 같은데, 선암사 중수비(사적비)는 절의 후문에 해당하는 북방의 후미진 곳에 자리를 잡고 있다. 이곳에 중수비를 세운 것은 선암사만의 비보와 관련된 특별한 사연이 있다고 전한다.

선암사가 중수비 건립을 결정하고 제작에 들어가자 중수비를 설치할 위치를 두고 여러 의견이 제기되었다. 대중들은 당연히 조계문에서 멀지 않은 대로변의 한곳에 세워질 것으로 생각들 하였으나 위치를 논의하는 중에 한 노장님이 중수비는 선암사의 지세와 관련하여 지금의 위치에 세워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즉 선암사는 백호의 지세인 남쪽이 실하고, 청룡의 지세인 북방이 허하여 기운이 북으로 빠져나가고 액운이 넘어듦으로 중수비를 북방에 세워 부족한 산세의 기운을 돕고 채워 백호와 균형을 이루도록 해야 한다는 의견이었다.

그래서 선암사의 대중들은 노장의 의견에 따라 중수비를 지금의 자리에 건립하게 되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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