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은 친밀함을 좋아한다. 하지만 친밀한 사이 일수록 더 많은 상처를 주고받는다. 우리는 주기도 받기도 싫은 상처를 친밀함 속에서 반복한다. 일을 하다보면 내 의견을 고집할 때가 많다. 토론에 익숙하지 않은 우리의 주장이 논쟁과 언쟁으로 변하는 것은 시간문제이다. 다수결에 밀리고 큰 목소리에 밀린다. 대부분의 참여자는 자신이 밀리는 쪽이라고 항상 느끼며 억울해 한다. 소소한 갈등이 생길 때마다 한마디로 정리 해주는 사람이 있다.

 
우리의 옥자 언니.

“힘드요? 왔다메! 힘들면 힘들다고 말하쇼. 도와달라고 말하재는”

“자기를 내려놓고 고개를 숙여 보쇼”

“다들 고맙소!”

작은 목소리로 꾸짖는 듯 토닥이는 듯 그렇게 우리를 평정한다. 연륜이라기보다는 도인에 가깝다. 언니의 말은 상처와 치유가 된다. 언니는 시인이다.

옥자 언니는 1957년에 태어났는데, 순천이 고향이다. 일본 유학을 다녀온 덕망 있는 아버지가 계셨지만 여순사건에 연루되어 옥고를 치르신 후 가세가 기울었다. 부모님은 7남매를 키우느라 힘드셨지만, 늘 자녀교육에 대한 미안함 때문인지 다음에 형편이 좋아지거든 꼭 공부하라는 당부를 하셨다.

언니가 성장했던 1960년대는 우리나라가 지독히 가난하던 시절이었다. 특히 그 시절, 시골의 딸들은 교육에서 소외되고 서울로 상경해 공장을 다니거나 애기담살이로 보내지곤 했다. 일찍 상경한 큰언니가 보내준 생활비 덕분에 남의집살이로 떠나진 않았지만 학업을 계속 할 수 있는 형편은 아니었다. 그래서 언니의 최종학력은 국졸이었다.

언니는 가난이 싫었다. 돈 버는 것이 인생 최고의 목표였다. 동외동에서 감자탕 집을 운영했는데 장사가 잘 되었다. 그렇게 살면 되는 줄 알았다. 나만 잘 살면 되는 것이라 생각했다. 언니가 허망하게 죽기 전까지는…
 

1991년 5월의 이야기

그해 4월에 시위하던 학생 강경대가 전경들의 구타로 사망한 후 5.18 광주민주화운동 시기와 맞물리면서 반정부 시위 열기가 가득했다. 하지만 나는 “부모가 보내준 돈으로 공부나 할 것이지, 한심한 대학생 놈들”이라며 욕을 했었다. 어느 날 경찰들이 와 있었다. 사람들이 웅성거렸고 간간히 ‘정순이(큰언니)가 데모하다가 죽었다네, 정신병이 있었단다, 이집이 빨갱이네 집이었다네’, 웅성거림 속에서 나와 전혀 상관없던 단어들이 들렸다. 언니가 죽은 것은 확실했다. 우리 가족은 피붙이의 죽음을 뉴스로 알게 되었다. 카톨릭 신자가 자살을 택했으니 신자들마저 등을 돌렸다. 지식이 짧은 여인은 나라 걱정도 하면 안 된다는 말인가? 언니의 신념은 흔적 없이 사라지고 신변을 비관한 자살로 보도되었다. 우리 가족은 아무것도 몰랐다.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그 당시 순천의 대학생들(류석, 박선택, 신화철 등)과 시민운동 하시던 박소정 선생님 외 많은 사람들이 우리 가족을 도와주었다. 그분들 아니었으면 우리 가족마저 언니를 외면했을지 모른다. 가난 때문에 고향을 떠났던 언니는 고향사람들 덕분에 마지막 길을 외롭지 않게 갔다.

▲ 오른쪽 위가 큰언니 이정순, 아래 오른쪽이 이옥자 언니다.

▶ 시는 언제부터 쓰셨나요?

나는 초등학교 밖에 못나왔다. 언니가 그리 가불고 난께 해마다 5월이 되면 언니한테 편지라도 쓰고 싶었다. 첨에는 노래처럼 부르기도 하다가 한 줄 두 줄 쓰기 시작한 것이 시가 되었다.

나는 그해 5월사건 이후 민족민주 유가족협의회 사람들과 인연을 맺고 학생운동으로 숨진 학생의 어머니들을 만나기 시작했다. 민가협 가족들과도 인연을 맺었다. 가족을 잃은 슬픔 특히 무엇보다도 자식을 잃은 어머니들의 애끓는 심정은 도저히 나누어 표현할 수 없는 아픔이었다. 그분들을 만나면서 나와 내 가족만 잘 살면 된다는 이기심이 부끄러워졌다. 그분들에게 내 위로를 전달하고 싶었다. 마음을 표현하는 짧은 글들이 모여 시가 되었다.
 

▶ 지금 학교를 다니시죠?

나는 지금 대학생이다. 어릴 때 아버님께서 하시던 말씀이 기억났다. “형편이 좋아지거든 꼭 공부를 해라” 공부를 하고 싶어 검정고시 학원 앞에 자주 서 있었다. 학원생 중에 80대 할머니도 계셨는데 내 나이를 물으시더니 “좋을 때다. 그 나이면 못 할 것이 없네” 하셨다. 좋을 때다 좋을 때!  얼마나 좋은 말인가? 나는 그렇게 공부를 시작했고 검정고시로 중학교와 고등학교 과정을 마쳤다. 남편과 아이들이 이제 대학교도 입학해보라고 응원해줘서 수시원서를 접수했는데 턱 하니 합격을 했다. 나는 그렇게 2011년 3월에 순천대학교 문예창작과 학생이 되었다. 지금 4학년인데 사회복지 복수전공을 하다 보니 졸업이 늦어지고 있다. 내가 대학생이라니 꿈을 꾸는 것 같다. 힘든 시기에 먼저 가신 분들을 위해 더 열심히 살고 싶을 뿐이다.

갑자기 공지영의 <봉순 언니>가 생각난다. 봉순 언니는 가난한 시절 가장 낮은 곳에 있는 여인이다. 그 시절 우리의 언니들은 가족을 위해 교육과 역할에서 차별받았고 열등하게 취급 받았다. 그들의 희생은 가족을 사회화시켰고, 남은 가족은 노동력을 창조하는 힘이 되었다. 우리는 분명히 노동력으로 인정받지도 못하는 그들의 포기와 헌신으로 성장했을 것이다. 오늘 자본주의의 가장 낮은 곳으로 밀려나 있던 우리의 언니들을 만났다. 하지만 두 언니는 순응했던 봉순 언니와 달랐다. 그들은 깨어 있었다. 벗어나기 위해 꿈틀거렸고 일어났다. 부당함에 맞서 소리 질렀다. 한 사람은 빛이 되었고, 다른 한 사람은 시인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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