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건강칼럼_삶 그리고 죽음

▲ 이정우
민들레하나한의원
원장
아침은 나날이 새롭다. 현관을 나서는데 1층에 사는 이가 심어놓은 나무에 꽃이 피었다. 손톱만큼 작은 하얀 꽃이 어쩜 이리 기품 있는 향기를 품을까!

명말 마을을 감싼 바위산에 아카시아의 하얀 꽃이 피었다. 난리다. 나는 아카시아 꽃의 향을 엄청 좋아한다. 은은하되 무겁지 않고, 달콤하되 질리지 않은 그 향기는 저절로 걸음을 멈추고 코를 벌름거리게 한다. 김남주 시인은 아카시아 향기에 넋을 잃은 친구를 보며, 꽃그늘에 그늘진 농부의 주름살을 생각했다. 밤별이 곱다고 노래할 수 없는 가엾은 리얼리스트가 나는 아니기에, 봄꽃 향기에 가슴이 솜사탕마냥 부풀어 오른다.

블루시안 아파트 옆의 작은 공원에서 할머니들이 잔디를 손질한다. 잔디 가운데 토끼풀이 작은 섬을 이루고 있다. 행운을 가져다준다는 네 잎 클로버를 싱겁게 아는 나는 잔디의 영역을 침범하여 자꾸 커지는 토끼풀 섬이 참 싫다. 토끼풀은 줄기 하나를 길게 밀어 올리고 하얀 꽃을 피운다. 초록색 토끼풀 바탕에서 빼꼼 올라온 하얀 꽃이 도드라졌다.

해룡천을 따라 아래로 내려가면 가지런한 논을 가로막고 있는 낮은 산을 만난다. 논과 산의 경계에 철쭉나무가 있다. 아니다. 하얀 철쭉꽃을 보고 그것이 철쭉나무인 줄 짐작할 뿐이다. 철 놓칠라 애타는 농부가 모내기를 위해 가두어둔 물에 하얀 철쭉꽃이 비친다. 농부는 트랙터로 논을 가느라 정신이 없고, 백로는 뒤집힌 논바닥에서 먹이 사냥에 정신이 없고, 나는 논물에 비친 하얀 철쭉꽃에 정신이 없다.

 

5월에 왜 이리 하얀 꽃이 많이 필까? 붉은색이나 노란색의 꽃은 각각 다른 색소를 가지고 있다. 다른 색은 각기 다른 곤충이나 새를 불러들인다. 모든 꽃이 똑같은 곤충을 불러들인다면 부족한 꽃이 생길 것이고 결국 번식하지 못해 멸종할 것이다. 다양성은 생존에 필수다.

색소를 갖지 않은 꽃은 하얗게 보이는데, 이는 색소 대신 공기가 차 있기 때문이다. 공기는 빛을 모두 반사하여 하얗게 보인다. 봄을 맞아 초록의 잎이 왕성하게 광합성을 할 때 하얀 꽃은 녹색의 잎 가운데에서 도드라진다. 눈에 잘 띄므로 곤충이 쉽게 찾을 수 있다. 사람 일반과 달리 곤충은 적록색맹이다. 붉은 꽃이라면 녹색의 잎과 구분하기 힘들다.

색소를 갖지 않은 꽃이 하얗듯, 검은 색소가 없는 머리는 하얗다. 하얀 머리카락을 가진 사람은 색소 만들 에너지마저 아까운 사람이다. 색소 하나 만들 힘을 아껴 다른 곳에 있는 힘을 쏟는 사람은 백발이다. 다 타버린 연탄처럼 백발도 활활 타오른 열정의 소산이고, 여전히 남겨진 불태울 소명의 표상이다. 누가 이 찬란한 백발을 염색하는가?

순천민들레하나한의원 원장 이정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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