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계산은 남도의 명산으로 송광사와 선암사가 있는 불교문화의 중심이며, 순천사람의 주요한 삶의 터전이다. 
순천시 송광면 출신인 김배선 씨는 약 15년 동안 조계산과 그 주변 마을을 누비면서 주민의 이야기를 수집하고 현장을 답사한 자료를 토대로,  ‘조계산에서 만나는 이야기’라는 책을 냈다.
이 책 주요 내용 중 일부를 김배선 씨의 동의를 받아 순천광장신문 독자들과 함께 공유하기 위해 연재한다. 편집국



▲ 선암사 일주문

선암사 일주문은 절에서 속계와 법계를 구분하는 경계에 세운 첫 번째 정문으로 문(경계)을 들어서는 순간 부처를 향해 한 마음을 가져야 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일주문(一柱門)이란 이름을 그대로 풀이하면 한 기둥의 문이다. 보통의 건물은 네 개의 기둥으로 구성하지만 절의 일주문은 두 개의 기둥을 일직선으로 세워 지붕을 얹는 독특한 양식이다. 그러므로 일주가 하나의 기둥이 아니라 양쪽에 있는 각각의 기둥을 일직선상에 세운 기둥이라는 뜻이다.

일주문에는 그 절이 자리 잡고 있는 주산의 이름과 절의 이름을 묶어 ‘○○산 ××사’라는 현판을 거는 것이 보통인데, 다른 절과 구분되는 현판을 내걸어 절의 격을 표현하기도 한다.

선암사 일주문은 화재로 가정(嘉靖)19년 중창하여 병자호란과 정유재란을 피해 1719년에 다시 중창하였다. 1500년 역사를 가진 선암사에 300여 년이라는 일주문의 나이는 보잘 것 없지만 거의 모든 건물이 소실된 정유재란의 병화를 겪지 않은 거의 유일한 조선중기 양식의 건물이다.

선암사는 터의 입지적인 여건 때문인지 대웅전을 중심으로 밀집된 구성과 종파적 특성 때문인지 사천왕문이 없어 본전들과 거리가 짧게 느껴진다. 일주문의 편액은 선암사가 선교양종 태고총림이라는 종찰의 위치에 있음에도 ‘조계산 선암사’라는 기본 명판만으로, 단아하고 힘찬 세로 삼열 행서체의 필치가 일주문을 압도한다. 그러나 아쉽게도 서각의 주인을 알 수 없다.

일주문의 뒤편에는 ‘고 청량산 해천사’라는 물 흐르듯 유연한 글씨로 새긴 선암사의 역사를 알려주는 명판이 하나 더 걸려있다. 청량산 해천사는 조계산 선암사의 옛 이름이다. 기록에 의하면 화재로 인해 폐허가 된 선암사를 심혈을 기울여 중창했던 상월선사가 조계산(장군봉)은 산이 강하고 물이 약한(山强水弱) 지세이며, 절의 위치가 불이 일어나는 아궁이 터와 같은 형세로 인해 화재가 잦다는 당시의 풍수적 믿음에 따라 화재를 예방하려는 방편으로 1761년(영조37년) 산의 이름을 청량산으로 절의 이름을 해천사로 바꿨다.

1824년 해붕대사가 다시 조계산 선암사로 고쳐 부르게 했다고 하니 현재 일주문의 ‘조계산선암사’ 현판은 이때 만들어졌고, 뒤편에 걸린 ‘고 청량산 해천사’ 편액은 옛 이름을 기리기 위해 1916년(대정5)년 경 풍관산인 안택희의 글씨로 제작하여 걸어둔 것이다

이 현판을 선암사 일주문의 옛 명판으로 잘못 알고 있는 사람이 가끔 있으나 예전을 뜻하는 ‘古’자를 앞에 놓은 것이 기념 현판이라는 것이다. 한 가지 특별한 것은 건물 안쪽 중앙 좌우 기둥 윗부분에 용머리가 조각되어 있다. 이 용머리는 법계를 지키는 수문장을 뜻하며 사천왕문이 없는 일주문에 용머리를 조각한다고 전한다. 
선암사 일주문 창건 때 조각한 우측 용머리가 6.25 전란 때 방치하여 빗물에 부식되어 1955년 추락한 것을 1957년 순천의 심남섭 목각 장인이 복원하였다고 한다. 그런데 1997년 문화재 도둑에 의해 모두 도난당한 것을 2002년 2월 심옹께서 은행나무로 2개월 간에 걸친 심혈로 복원한 것이 현재의 용두라고 한다. 


     삼인당(三忍塘)    

▲ 삼인당
      
선암사 일주문에서 약 60m를 내려가면 물을 끌어들여 만든 타원형(달걀형)의 자그마한 못이 있다. 크기는 긴 거리가 약 30m, 짧은 폭이 약 20m이다. 못 안에는 자그마한 인공섬을 만들어 꽃무릇(상사초)과 배롱나무 한 그루를 심어 아름다운 정원의 연못처럼 꾸며 놓았다. 앞 둑에 나란히 서있는 커다란 전나무 세 그루는 삼인의 의미를 돋우고 있고, 여름 한철에는 배롱나무의 붉은꽃이 연못에 그림자를 드리워 더위를 식힌다. 9월로 들어서면 꽃무릇(상사화)이 정수리에 소복하게 만발하여 시선을 사로잡는다. 뿐만 아니라 이곳 주변의 단풍으로 가을 경치가 아름답다.
그래서 선암사를 찾는 관광객들은 너나없이 이 연못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는다. 삼인당은 도선국사가 선암사를 창건할 당시 만들었으나 오랜 세월이 흐르는 동안 허물어지고 메워진 것을 순천시의 유지와 공인들이 문화재 보호의 첫 사업으로 1996년 9월 15일 복원하였다고 한다. 뒤편의 기념비에 이 내용이 새겨져 있다.

연못 내 인공 섬에는 1996년 재축성 때까지 연못가에 있는 나무와 동일한 전나무 한 그루가 있었으나 많은 사람들의 아쉬움 속에 잘리고 말았으며, 인공섬은 연못을 크게 보이도록 하는 건축학적 배려로 이미 남도의 이름 있는 정원의 연못에서 그 표본들을 만날 수 있다.

못 가에 세워둔 안내문은 삼인(三忍)을『제행무상(諸行無常) 제법무아(諸法無我) 열반적정(涅槃寂靜)의 삼법인이라 이르며 모든 것은 변하여 머무름이 없고 나라는 것도 없으므로 이를 알면 열반에 들게 된다.』고 삼인당의 뜻을 설명하고 있다.

삼인당은 안내문처럼 부처님의 말씀을 기리기 위한 연못이다. 하지만 풍수지리(명당)와 관련된 흥미로운 사실도 전해오고 있다. 도선이 삼인당(연못)을 만든 또 다른 목적은 비보(裨補)에 있었다고 전한다. 비보란 모자람을 도와서 채운다는 뜻의 풍수지리 용어이다.

“도선국사께서 선암사 창건을 마치고 장군봉에 올라 흐뭇한 마음으로 살펴보다가 무엇인가에 놀라 무릎을 치며 “아차! 아궁이 터에다 법당을 짓고 말았구나!” 하고 소리치더니 그 길로 뛰어 내려와 화기를 누르기 위한 비보로 연못을 만들고 삼인당이라고 하였다는 것이다.

도선이 세운 전국 곳곳의 절터에는 비보의 흔적들을 찾아볼 수가 있는데, 광양 옥룡사(도선의 시신이 발굴된 곳)의 동백나무 숲 또한 도선국사의 비보라고 전한다. 선암사는 국태민안을 지키기 위해 도선국사가 세운 우리나라의 삼백여 비보사찰 중의 하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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