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생 : 자신이 틀렸음을 인정하지 않는 사람들 때문에 무척 괴로우시다고요? 그런데, 조금 전 말씀 중 “비폭력대화의 기본은 솔직하게 말하는 거다”라는 것에 대해 저는 조금 달리 생각해요. 저도 물론 솔직하게 말하는 걸 좋아하고, 용창씨가 ‘진실’에 대한 강한 욕구를 가지고 있는 것도 알겠어요. 하지만, “자신이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을 남도 중요하게 여겨야 한다”라고 말하면, 그것은 욕구가 아닌 수단이 되고 남에 대한 강요와 협박이 되어 버려요. 그 상대방은 진실이나 솔직함이 아닌 다른 욕구를 더 강하게 느낄 수도 있지 않겠어요?
용창 : 예, 그러고 보니 맞는 말씀 같아요. 알겠어요. 저는 진실을 중요하게 생각하지만, 남들은 그렇지 않을 수 있겠네요. 제 욕구를 강요하는 것도 폭력일 수 있다는 것도 알겠어요. 하지만, 문제는 여전해요. 상대방이 계속 거짓을 고집할 때 저는 어떻게 그와 대화를 할 수 있을까요?
선생 : 상대방과 어떻게 대화할 수 있는가라고 물었지요? 그 상황에서 용창씨가 중요하게 여기는 욕구는 무엇일까요? 진실이라는 욕구 말고요. 그 사람과 대화가 안 돼서 답답함을 느꼈다면, 혹시 연결의 욕구 아닐까요? 그와 연결되고 싶다, 혹은 그와 소통하고 느낌을 나누고 싶다, 그와 함께 의견을 공유하면서 뭔가 생산적인 일을 하고 싶다, 이런 건가요?
용창 : 맞아요. 연결의 욕구. 저는 사람들과 솔직하게 얘기하면서 재미나게 일을 하고 싶어요. 그리고 제가 상처를 가지고 있는 것처럼 다른 사람들도 상처를 가지고 있다는 걸 알아요. 저는 이런 상처들도 함께 이야기하고 함께 치유해나가고 싶어요. 그걸 연결의 욕구라고 부를 수 있을 것 같아요. 하지만, 그 다음은요? 그렇게 솔직하게 말하지 않는 사람들하고도 저는 연결하고 소통하고 싶은데, 저의 욕구를 어떻게 충족시킬 수 있습니까?
선생 : 좋아요. 이제 용창씨의 욕구를 찾았으니, 상대방의 감정과 욕구를 찾아보자고요. 자기가 틀린 것 같은데도 불구하고 그걸 끝까지 우기거나, 혹은 용창씨와의 소통을 거부하면서 입을 닫아버릴 때, 그 상대방의 느낌은 무엇이었을까요?
용창 : 혹시, 두려움일까요? 우리나라 학교에선 시험 문제 틀리는 걸 무슨 죄악처럼 취급하잖아요? 심지어 교사들 중엔 시험 문제 틀린 갯수대로 때리는 사람들도 있고요. 그러니까 많은 한국인들은 자기가 틀리는 것에 대해 수치심과 죄책감을 느끼는 것 같아요. 그런데, 그런 수치심은 참으로 부당한 거예요. 우리는 모두가 틀릴 수 있고, 틀린 생각을 할 권리가 있잖아요? 틀린 게 뭐가 창피한가요? 그냥 틀렸다고 솔직하게 인정해버리면 되는데.
선생 : 틀리는 것에 대한 두려움을 찾아낸 것까진 좋아요. 그런데, 틀린 게 뭐가 창피한가라는 말씀에는 동의하기 힘드네요. 용창씨는 학교에서 공부를 잘 했던 사람이고 자존감이 높기 때문에, 자기가 틀리는 것에 대해 당당하지만, 다른 사람들에겐 그것이 매우 두려운 것일 수도 있거든요.
용창 : 그렇겠네요. 자꾸 제 기준으로 남을 판단하고 있네요.
(다음 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