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년은 미래다. 그러나 한국을 넘어 세계의 청년들이 길을 잃고 헤매는 중이다. 지금의 청년은 예전의 청년이 걸었던 길을 걸을 수 없다. 이전과 다른 세상이 그들 앞에 놓여있기 때문이다. 자본주의의 성장시대는 종착지에 이르렀다. 자동화, 인공지능 등으로 인간 노동은 적어지며, 세계 주요국의 인구는 빠르게 감소하고, 지구 환경은 너무 빨리 나빠지고 있다. 그러므로 지금까지의 ‘물질적 부의 축적을 통한 성공’ 욕망은 이제 ‘사회적 관계 속에서의 행복’ 추구로 변화해야 한다.

성장 신화에 기반을 둔 ‘소비와 경쟁의 메커니즘’에서 벗어나, 탈성장을 통한 ‘사회적 공존과 협력의 패러다임’으로 전환해야 한다. 이러한 대전환기를 헤쳐 나갈 청년은 지금 어디에 있는가? 현실은 청년에게 하루살이 인생을 강요한다. 눈앞에 닥친 취업의 문제로 미래를 옭아매고, 3포, 5포, 7포의 고통으로 상상력의 숨통을 틀어막는다. 이제 정규직이 그들의 희망이 될 수 없으며, 퇴직금으로 노후를 맞이할 수 없게 되었다. 한마디로 예전까지의 삶의 방식과는 다른 인생을 살 수밖에 없는 실정이다.

절박한 현실의 타개책으로 청년 일자리 창출을 얘기하지만, 경제적 해법은 문제의 본질이 아니다. 사람이 빵만으로 살 수 없는 것처럼, 청년에게 예전의 직업을 갖게 한다고 인간의 목적인 ‘행복’에 도달하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이제 구시대적 직업관으로 평생 밥벌이를 할 수도 없겠지만, 본연의 청년은 꿈을 꾸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청년에게는 이 세상과 다른, 이 세상에 없는 새로운 일을 벌일 수 있는 에너지가 있다. 이 새로운 것이 싹을 틔우고 자라게 할 ‘현실에서 멀어진 시공간’이 필요하다.

우리는 이제 포기하는 것부터 배워버린 청년들에게 ‘숨 쉴 자유’를 허락해야 한다. 서울시가 2013년부터 열고 있는 ‘청년허브’도 모델이 될 수 있다. 성남시의 ‘청년배당’이나 프랑스의 청년정책도 눈여겨볼 구석이 있다. 미셸 뚜르니에는 “일은 인간의 본성에 맞지 않는다. 하면 피곤해지는 게 그 증거다.”라고 설파했다. 본성에 맞으면 피곤하지 않고, 노는 것도 피곤하지 않다. 모든 창조는 놀면서 나왔다. 청년들에게 창조와 모험을 요구하기 이전에 제대로 놀 수 있는 시간과 공간을 마련해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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