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천만국제정원박람회가 개장 130여일을 지나고 있다. 초반의 뜨거웠던 열기와는 달리 무더운 여름을 맞아 관람객의 수가 크게 줄기는 했지만 이제 무더위가 지나고 날씨가 조금만 서늘해지면 또 다시 많은 관람객들이 정원박람회장을 찾을 것으로 예상된다.

우리 국토 혹은 우리 고장 어느 한 곳도 우리의 역사가 얽혀있지 않은 곳이 없겠지만 정원박람회가 열리고 있는 곳, 특히 한국정원이 위치한 그리 높지 않은 산은 우리 순천으로서는 매우 중요한 역사를 간직한 곳이다. 현재 순천청암대학 앞 오천동에서부터 동천변 오림마을까지 이어지는 산은 보통 홍내산 혹은 해룡산 혹은 망월산이라 불리는데 이 산은 현재 기록으로 남아있는 순천의 가장 오래된 역사이야기가 전하는 역사적인 산이다.

순천만의 옛이름은 용두포이며, 남해 바다에서 여자만을 거처 순천만으로 들어오다 보면 순천만의 양쪽에서 순천만을 지키고 있는 기다란 두 산이 있는데 순천에서 바라볼 때 현재 순천만 전망대가 위치한 왼쪽 산이 용산(원래 이름은 용두산)이요, 오른쪽으로 별량면 장산 마을에 있는 산이 호산 곧 호랑이산이다. 그래서 이 두 산은 예로부터 순천을 지키는 문, 즉 용호문(龍虎門)으로 불렸다. 물론 실제로 용과 호랑이가 순천을 지킬 리는 없을 것이지만 굳이 우리 조상들이 그 두 산을 용산과 호산이라고 부르며 순천을 지키는 수호신처럼 여겼던 것은 그만큼 남해를 통한 외적 특히 왜구(일본의 해적)의 침입이 많았음을 반증한다.

기록에 따르면 고려 말부터 조선 초에 걸쳐 가장 많은 왜구의 침입이 있었던 것으로 되어있지만 실제로 왜구의 침입은 신라의 삼국 통일 전후부터 많이 있었던 것 같다. 선덕여왕이 부처님의 힘을 빌려 신라 주변 외적을 제압하기 위해 황룡사 9층 목탑을 건축할 때 맨 아래층인 1층은 왜를 제압하기 위해서였다는 사실과 죽어서 동해의 용왕이 되어서 왜구의 침입을 막겠다고 했던 문무왕의 유언이 그러한 상황을 이야기 해 준다.

신라 말에 신라가 후삼국으로 분열할 때 쯤 역시 많은 왜구들이 바다를 통해 순천으로 침입해 왔을 것이다. 특히 당시에는 현재의 순천만 자연생태관 주변은 물론 앞서 언급한 해룡산 앞까지 바다였으니, 순천만을 따라 올라온 왜구들의 침입으로부터 비교적 안전한 내륙에 해당하는 현재의 순천 도심 지역을 보호하기 위해서는 순천만 방면이 훤히 내려다보이는 전략적인 요충에 군대를 주둔했어야 할 것이다. 바로 그럴만한 전략적인 요충지가 해룡산이었던 것이다.

신라 말, 왕권은 약화되고 중앙의 귀족들은 사치와 향락에 빠져 정치를 제대로 돌보고 있지 않을 때, 각 지역의 힘있는 세력들은 스스로 장군이나 성주를 자처하며 자신의 지역을 독자적으로 다스렸다. 역사는 이들을 호족이라고 부른다. 신라 말 당시에 순천의 호족은 박영규라는 분이었다. 이 분이 순천을 외적으로부터 지키기 위해 치소(治所 곧 다스리는 곳)를 두었던 곳이 바로 해룡산이다. 당시에는 해룡산에 토성을 쌓고 외적을 막았는데 그 흔적이 지금도 해룡산 곳곳에 남아있다.(이미 순천대학교 박물관에서 시굴을 하여 많은 부분이 밝혀졌다.) 박영규 장군은 해룡산 뿐만 아니라 현재의 청암대 뒷산인 남산(당시에는 인제산 혹은 건달산이라고 불렀다.)에도 성을 쌓았는데 역시 지금도 당시에 쌓은 무너진 석성의 흔적을 곳곳에서 확인할 수 있다.

뒤에 후백제를 건국한 견훤은 전남 동부 지역을 아우르는 큰 세력인 박영규 장군을 반드시 자기 편으로 끌어들여야 했을 것이다. 그래서 견훤은 자신의 딸과 박영규 장군을 혼인시킨다. 이렇게 견훤의 사위가 된 박영규 장군은 해룡산과 인제산을 근거로 외적 특히 왜구의 침입을 막아내며 순천을 다스렸을 것이다. 그런데 후삼국의 형세를 이루어 신라와 맞서고 후고구려와 맞서던 후백제왕 견훤이 자신의 큰 아들인 신검과의 갈등으로 인해 금산사에 유폐를 당하는 사건이 발생한다. 견훤은 요행히 탈출하여 한 때 자신의 가장 큰 적이었던 왕건에게 투항해 버린다. 이 상황에서 박영규장군은 갈등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자신의 장인이며 전 주군인 견훤을 따를 것인가? 현재의 주군을 따라 자신의 나라를 지킬 것인가? 이런 갈등 속에서 박영규 장군은 결국 민심을 따른다. 기록에 의하면, 당시 박영규 장군은 “왕건이 인자하고 부지런하며 검소해, 민심을 얻어 하늘의 계시를 받았으니, 반드시 삼한의 주인이 될 것이다”라고 판단하고, 결국 왕건에게 투항했다고 한다. 아마 이것이 후백제의 신검으로서는 나라가 무너지는 결정적인 타격이 되었을 것이고, 고려의 왕건으로서는 후삼국 통일의 결정적 힘이 되었을 것이다. 그래서 훗날 고려 충선왕 2년(1310년)에 고려 조정은 당시 승주였던, 우리 고장에 ‘순천’이라는 지명을 내리게 되는 것이다. 이후 박영규 장군은 고려 조정에서 높은 관직을 얻게 되며 죽어서는 순천사람들에 의해서 해룡산신 혹은 인제산신으로 불리며 순천을 지키는 신으로 추앙받고 있다.

이렇게 하어 순천이 ‘순천’이라는 지명을 받은 지가 올해로 703년째이다. 아마 순천지명 703년 역사상 순천이 치른 가장 큰 행사가 지금 치르고 있는 순천만국제정원박람회일 것이다. 그런데 그 정원박람회의 주 무대가 바로 ‘순천’이라는 지명을 받게 했던 박영규 장군이 1100여년 전 순천을 지키기 위해 근거를 삼았던, 해룡산성 자락이라는 것은 역사의 우연치고는 대단한 우연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지금 해룡산에 올라가면 당시 쌓았던 토성의 흔적을 어렴풋이 확인할 수 있다. 박람회장을 둘러보고 순천의 옛 역사를 찾아 그 현장을 한번 확인해 보는 것도 의미가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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