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계산은 남도의 명산으로 송광사와 선암사가 있는 불교문화의 중심이며, 순천사람의 주요한 삶의 터전이다. 
순천시 송광면 출신인 김배선 씨는 약 15년 동안 조계산과 그 주변 마을을 누비면서 주민의 이야기를 수집하고 현장을 답사한 자료를 토대로, 올 6월 ‘조계산에서 만나는 이야기’라는 책을 냈다.
이 책 주요 내용 중 일부를 김배선 씨의 동의를 받아 순천광장신문 독자들과 함께 공유하기 위해 연재한다. 편집국




▲ 감로암 (원경)

감로암(甘露庵)

감로암은 송광사 제6세 원감국사가 창건했다고 전해진다. 그래서 창건 시기를 1286~1293년(고려충렬왕 12~19년)으로 추정한다. 그 근거는 원감국사가 송광사(수선사) 주지로 주석(『사지』 238쪽 주지 계보)하다 입적하였고, 1313(충숙왕 원년)년 8월 이곳에 비를 세웠으나 파괴된 지 200년이 지난 1701년에 중건하였다는 내용이 실린 국사의 비가 감로암의 바로 앞 잔등에 거북의 등을 타고 서있기 때문이다.

감로암은 송광사 대웅전에서 북방 약 400m 거리에 있다. 사람들은 ‘감람’이라고 불러왔다.

감로암을 오가는 큰길은 현재의 어린이법당 오른쪽에서 부도전(율원)으로 오르는 길이다. 그러나 스님들은 도성당(옛 보제당) 뒤편 언덕으로 올라 부도전 앞을 지나 개울을 건너는 지름길을 주로 사용하였다.

감로암은 본당과 별당(요사채), 그리고 공루와 정문으로 구성되어 있다. 대중을 수용할 수 있는 규모는 아니고, 강원과 같은 수도장을 개설하였다는 기록도 없다. 그래서 감로암은 큰스님이 주석하는 조실 또는 때에 따라 여러 스님들이 기거하는 수행처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700년 이상 빛을 발하던 원감의 터도 1950년 6․25의 전운과 화마를 피할 수 없어 폐허가 되고 말았다. 그 후 20년이 지난 뒤 멀리 부산에서 진일심화(陳一心華) 비구니가 삽을 들고 찾아와 불럭 담을 쌓아올려 1971년에 중건을 완료하고 기거하니 새로운 감로암은 일명 동명불원(東明佛院)이라는 명칭을 장등의 기둥에 새겼다.

‘동명’의 어원은 당시 부산에 있던 우리나라 최대의 합판회사 이름인 ‘동명목재’에서 왔으니 감로암의 화주 진일심화 비구니가 동명목재의 사장(강석진)의 가족이었기 때문이다. 전통의 목조가 아닌 시멘트 블럭으로 지어 규모와는 달리 품격이 전통사찰(송광사)에 어울리지 않았다.

이후 1976년에 한 차례 증개축이 있었다. 1987년 진일심화 비구니가 떠난 후 송광사 스님들이 2007년 겨울에 30년을 넘긴 시멘트 건물을 헐어내고, 2008년 봄에 전면 5칸, 측면 3칸 팔작지붕의 본당(원통전)과 문간채 그리고 해우소를 목조건물로 새롭게 개축했다. 그리고 2008년 2월 10일 발생한 국보1호 숭례문 방화사건에 따라 사찰문화재 화재 예방 차원에서 원감국사 비가 서있는 잔등도 새롭게 장비하였다.

감로암 앞 오솔길의 오른쪽 산비탈에는 암자의 이름처럼 감로수를 받아 떨구는 이끼 낀 석정의 고풍이 찾아드는 손님의 발길을 멈추게 한다.  
 

부도암(浮屠庵) 

부도암은 송광사가 배출한 선승의 부도를 모신 부도밭과 나란히 있는 암자이다. 큰절(대웅전)의 북쪽 약 150m 지점에 뻗어 내리던 산비탈이 완만해져 넓은 들판이 펼쳐진 것과 같은 이곳을 『송광사지』는 북쪽 벌판이라는 뜻의 북원(北原)으로 표기하고 있다.  

부도전으로 가는 길은 송광사 일주문 약 80m 지점의 다송원 앞에서 낙하담을 건너 어린이법당 앞을 오른쪽으로 돌면 편백림 언덕을 향해 오르는 포장길이 있다. 감로암과 함께 부도전으로 오르는 큰길이다. 어린이법당에서 약 150m지점에 이르면 송광사 역대 선사들의 부도(탑) 밭과 이를 보살피는 전각(암자)이 나타난다.

▲ 부도암 본당
▲ 부도전 전경

『송광사지』에 의하면 1616년(광해군 8년) 부휴대사(浮休善修)의 탑을 이곳에 세운 것이 부도전의 시초이다. 그리고 1650년에 송계영각(松溪靈覺)선사의 부도가, 1660년에 벽암원조(碧巖圓照)대사의 탑이 들어서므로 부도 밭의 형태를 이루었다. 이후 뇌정진령(雷靜眞靈)의 탑이 서고, 1669년 취미대사(翠微大師)의 부도가 세워졌다. 1678년(숙종 4년) 부휴 탑 위에 좌우로 송광사 사적비와 보조국사 비를 세웠으니 부휴대사 탑을 세울 때 이미 부도전의 터로 선정되었음을 알 수 있다. 사적비와 보조국사 비를 위에 세운 것은 훗날을 염두에 두고 부도전을 설계한 것임을 알 수 있다. 첫 탑이 들어선지 29년이 지난 1689년에 그 옆에 커다란 암자를 짓고 ‘부도암’이라 했다.

이후에도 유영 백암(1700년), 혜공 휴암 부용(1719년), 우계 벽오 영해(1754년), 완화 백암(1766년), 풍암(1767년), 일주 묵암(1790년), 벽담(1799년), 회계(1806년), 환해(1820년) 자암 용운(1895년), 묵암(1897년), 제운(1902년), 화운(1902년), 두월(1916년)의 탑비가 차례로 들어섰다. 300년(1616~1916년)이 지나는 동안 숲을 이루자 1917년에 설월선사께서 담장을 두루는 공사를 하여 현재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그러나 이후 일제 강점기와 6․25 전쟁 등으로 돌 볼 엄두를 내지 못하다가 1960년대 이후 송광사도 서서히 승보의 제자리를 찾게 되면서 1980년대에 들어서 취봉(翠峰), 금당(金堂), 광훈(廣薰), 인암(忍庵), 계룡(溪龍) 스님 등 다섯기의 부도가 앞 열에 세워지면서 모두 5비 29탑 (2008년 기준)이 되었다.

부도전의 모양과 담장의 규모는 가로가 18m인데, 오른쪽에 문간이 있고, 세로가 39m인 직사각형이다. 흙돌담의 높이는 1.5m이고, 위에 기와를 얹어 모양이다. 탑비는 4단으로 나누어 조성된 잔디밭의 제일 위쪽 중앙에 ‘보조국사 비’(지방유형문화재 제91호)가 있고, 그 오른쪽으로 사적비가 서 있다. 각단은 1세기를 의미한다. 모든 부도는 부휴 계열로서 각 단별로 종횡 세순에 따라 안치되었고, 중앙 열은 부휴대사의 적통이라고 한다. 그러므로 처음 부도 밭을 조성할 때부터 계획적으로 안배했음을 알 수 있다. 

부도암은 본당과 누각[聚淨樓], 요사채로 구성되어 있다. 통행로는 일주문 약 80m 앞 다송원에서 개천(낙하담)을 건너 편백림 옆으로 난 자동차 길을 따라 약 200m 오른 지점이다. 큰절에서는 무무문 앞 언덕으로 스님들만 왕래하는 길이 따로 있다.  

부도암은 조선 숙종15년(1689년) 백암 노선사의 지시에 따라 설명(雪明)선사가 창건하여 1775년 초가을부터 약 1년 간 묵암대사가 주석하였다. 1924년에는 석정을 만들었으며, 1925년 건물을 다시 지어 1942년 공루를 철거하였다는 내용이 부도암에 관한 기록의 거의 전부이다. 1969년 송광사가 조계총림이 되면서 율원으로 바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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