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보 바보 이야기』/ 윤구병 글, 홍영우 그림 / 휴먼어린이

▲ 심명선
어린이책시민연대 전 대표
어느 마을에 원인모를 몹쓸 돌림병이 돌았다. 그 병은 사람들 가슴이 돌덩이처럼 차갑게 굳어져 서로 마음을 닫고, 문을 닫아걸어 말도 안 나누고 서로 쳐다보기 조차 싫어하는 그런 무서운 병이었다. 마을의 어른인 할아버지가 나서 마을 한복판에 섶나무를 쌓아 불도 피워보지만, 가슴이 돌덩어리가 된 마을 사람들은 예전처럼 모여들지 않았다. 답답한 마음에 해님에게 빌어 사람들의 마음을 녹여 달라고 했지만, 땅이 타들어가는데도 사람들 마음을 녹이지는 못했다. 결국 할아버지는 돌을 나르다 무릎을 크게 다친 노새를 타고, 꽁지불이 약해 외톨이가 된 반딧불이를 길잡이 삼아 마을 사람들의 마음을 녹일 수 있는 약을 찾으러 길을 떠난다.

이 마을 저 마을, 이미 가슴을 돌덩이로 만드는 그 돌림병이 돌아 할아버지는 가는 곳마다 푸대접을 받는다. 그러다가 잠시 목을 축이느라 멈춘 시냇가에서 댓잎배가 떠내려오자 그걸 따라 가다가 댓잎배를 띄우고 있는 아이를 만난다. 할아버지 일행을 만난 아이는 다짜고짜 노새의 아픈 다리를 붙잡고 앙 울음을 터뜨리며 ‘불쌍해, 불쌍해’ 하자, 곧 노새의 다리는 씻은 듯 낫는다. 또 반딧불이를 손에 올리고 ‘불쌍해, 불쌍해’하며 우니 반딧불이의 꽁무니 불빛이 예전처럼 돌아온다. 울보 바보를 만난 할아버지와 노새 반디불이는 함께 울고, 온통 물바다가 된 눈물은 냇물을 따라 흐르며 냇가에서 빨래하는 아낙의 손에 닿으니, 얼어붙었던 그들의 가슴을 녹이고, 그 물에 놀던 물고기를 잡아 끓여먹은 남정네들은 다시 예전처럼 몸으로 엉기고 뒤섞여 즐겁게 논다. 할아버지와 함께 마을로 가던 울보 바보는 가는 길에 만난 마음이 얼어붙은 사람들에게도 ‘불쌍해 불쌍해’ 하면서 울음보를 터뜨린다. 마음이 녹은 사람들은 덩달아 울고, 눈물은 모여서 온 세상을 녹이고 산천초목과 짐승, 물고기들에게 생기를 불어 넣었다.

 

결국 울보 바보의 눈물은 가슴을 얼어붙게 만들었던 돌림병 치료제가 되었다. 상대방의 아픔에 가슴 아파하며 울어 주고, 함께 흘린 눈물은 많은 사람들의 차가운 마음을 따뜻하게 하고 세상을 변화시키는 힘이 되었다. 책을 읽는 나도 울보 바보가 앙 하며 눈물을 쏟아내는 대목에서는 울컥하기까지 하다. 그런데 가족이나 친구처럼 가까이 지내는 사람들끼리도 서로의 아픔을 깊이 이해하기가 좀처럼 쉽지 않은데, 하물며 알지도 못하는 누군가를 위로하고 눈물을 흘릴 수 있는 마음은 과연 어떻게 가능한걸까?

인간이라면 남의 어려움, 위험, 고통, 불행 등을 보면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일어난다는 측은지심(惻隱之心)이 당연하다고 하기엔, 우리가 살아가는 모습은 너무나 비인간적일 때가 많다. 불쌍히 여기기는커녕 오히려 외면하거나 더욱 짓밟아서 사지로 내모는 경우가 허다하다. 게다가 불행하게도 용산 참사, 쌍용차 사태, 밀양 송전탑 그리고 세월호 참사 진상규명에 대한 현재 우리 사회 모습처럼 이러한 폭력은 개인과 개인간 뿐만 아니라 국가 권력이 개입하여 자행되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어쩔 수 없잖아’라며 스스로를 합리화하면서 눈을 감아버리기도 한다. 때로는 노새나 반딧불이처럼 조금 다른 사람들을 타자화하며 나를 '정상'의 테두리 안에 넣으며 구분한다. 파편화된 인간의 본성을 찾아 줄 이 시대의 ‘울보 바보’를 찾아 나서야 하는 것일까?

마을의 어른이었지만, 온갖 방법을 다 쓰고도 별 수 없었던 할아버지는 사람들 마음을 녹일 약을 찾아 길을 떠난다. 기운이 떨어져 걷기조차 불편한 할아버지와 동행한 것은 다리를 다친 노새와 꽁무니 불이 희미한 반딧불이. 각자의 모자람은 서로를 의지하게 만들어 주었고, 그들이 만난 울보 바보 역시 다르지 않았다. 깊은 숲 속에서 이 세상 떠날 날이 얼마 남지 않은 할머니와 살고 있는 아이. 얼핏 보기에 그들 처지에서 누구를 불쌍히 여길 만한 상황은 아니다. 그런데 어쩌면 이런 각자의 ‘결핍’이 다른 사람을 바라보게 하는 힘은 아닐까? 내 부족함만을 채우기 위한 이해타산이 아니라 ‘못난 놈들은 서로 얼굴만 봐도 흥겹다’는 어느 시인의 말처럼 서로를 품어줄 수 있는 사랑의 마음 말이다.

얼마 전 세상을 떠나신 신영복 선생님은 말씀하셨다. “관찰보다는 애정을, 애정보다는 실천적 연대를, 실천적 연대보다는 ‘입장의 동질함’이 중요합니다. ‘입장의 동질함’ 그것은 관계의 최고 형태입니다.” 어쩌면 문제는 우리 시대의 ‘울보 바보’를 찾는 일이 아닐지도 모르겠다. 홀로 살아갈 수 없는, 그래서 ‘우리’가 필요한 나 자신을 인정하는 일이 먼저다. 그리고 ‘너’는 언제든지 ‘나’가 될 수 있음을 잊지 않는 것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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