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동안 내 인생에서 일어난 일들을 읽어보니 자랑이라고 내놓을 만한 것이 없다. 불운을 나열하고 불평을 한 것뿐이다. 이것으로 무엇을 얻을 수 있을까? 동정? 그딴 건 내가 원하는 게 아니다.

피곤해져서 불을 끄고 눕는데 머리가 베개에 닿는 순간 차가운 회오리바람이 불며 사방이 깜깜해졌다. 전등불을 껐을 때의 어둠과 비교할 수 없이 깊은 어둠이었다. 

‘어. 이게 뭐지?’

집어 삼킬 듯 조여 오는 어둠과 차가움에 놀라 몸을 떨었다. 집, 엄마, 경찰, 아무 것도 나를 도와줄 수 없었다. 나는 소름 끼치는 어둠속에서 혼자였다.

극심한 두려움 속에서 정신을 차려보니 내가 모니터 앞에 앉아서 자판기를 두드리고 있었다. 방금 전에 쓴 글 밑에 첨삭지도 같이 쓰여 지는 빨간 글씨는 내 글이 아니었다. 내 손은 내 의지와 상관없이 움직이고 있었다. 나는 꼼짝 못하고 바라보고 있었다.

(흠, 사라진 제국의 왕자 같은 우월 의식에다가 안개 같은 우울이 적당히 버무려진 글이군. 그러니까 네 마음속에 그린 초상을 한 줄로 표현하면 이거잖아.
“전에는 잘 살았는데 지금은 망했다.”
학창 시절의 우월한 성적, 그것 때문에 괴롭다구? 자네 그걸 도대체 언제까지 써먹을 건가? 아직도 기회만 있으면 써먹으려고 하고 있기 때문에 괴로운 거야. 그 때 칭찬 받고 으시댄 걸로 끝난 걸 가지고 말이야. 마을버스 타고, 지하철 타고, 공항열차 타고 이제 비행기를 탈 차롄데 마을버스 탈 때 낸 요금 가지고 비행기까지 타겠다고 우기는 거와 뭐가 다른가? 공항열차까지는 환승 제도라는 게 있어서 연결되지만 비행기는 전혀 딴 얘기야.)


“아니에요. 아니란 말에요!”

마음속에서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분노와 울부짖음이 요동쳤다. 그러나 입술이 얼어붙은 나는 한마디도 할 수 없었고 모니터 속에는 내 생각과 상관없는 빨간 글씨가 계속 생겨나고 있었다.

(직장 생활에서 부적응? 처음부터 익숙하고 편안한 곳이 어디 있니? 거긴 그 때까지 살던 환경과 완전히 다른 곳인데, 시간을 가지고 기다려봐야지. 세상에 태어난 것도 아무도 모르는 곳으로의 편입이지만 살아냈잖아. 넌 참고 기다리는 것을 못해서 일을 어렵게 만든 거야. 쓸데없는 자의식과, 조급함이 문제라니까.)

게임이 끝나기 전에 만회할 수 없이 간격이 벌어져 있다. 나는 게임판을 벗어나고 싶다.

(네 마음대로 안 되는 세상이라 죽고 싶다고? 그건 네 마음대로 되는 일이 아니다. 죽을 때가 되면 죽고 살 때가 되면 사는 건데 그걸 네 마음대로 할 수 있다는 생각 때문에 괴로운 거야.) 

타다닥 소리를 내며 마지막 문장이 완성되는 순간 모니터에 있던 글들이 사라졌다. 여태까지 써내려왔던 검정, 빨강 글자가 사라지고 하얗게 변한 바탕 화면 위에서 커서가 깜빡거렸다.

그런데 말이야, 저런데 말이야, 두런두런 얘기하는 소리가 자장가로 들려왔다. 나는 파도처럼 밀려오는 노곤한 피곤함에 휘감겨 잠이 들었다. 

잠에서 깨어나자 곧장 책상 위로 달려갔다. 내가 써 놓은 글이 그대로 있었다. 빨간 글씨 따위는 없었다. 깜빡깜빡 나를 바라보고 있는 커서가 반가웠다.

나는 마우스를 쥐고 이리저리 움직여 커서의 위치를 바꿔보았다. 문장을 수정하고, 삽입하고, 단락을 잘라서 다른 쪽으로 가져가 이어붙이고 다시 처음 자리에 가져다 놓기도 했다.

나는 어제 쓴 글을 모두 지우고 하얗게 변한 바탕 화면 위에서 깜빡거리는 커서를 바라보았다.  

‘너는 누구니?’

한 자, 한 자 칠 때마다 커서가 뒤로 물러나 깜빡였다. 삶의 발자국처럼 찍히며  뒤로 물러난 커서가 ‘다음은 뭐지?’ 호기심 가득한 눈을 깜빡거리며 기다렸다.

좋아하는 것 찾아다니는 나, 싫어하는 것 피해 다니는 나, 내가 어디에 있나 찾아다니는 나, 나는 누구인가 묻고 있는 나...

그 모두가 나다. 고정된 나는 없다. 매순간 모든 것이 될 수 있는 나는 지금, 여기에 있다. 바로 지금 여기에서 맥박처럼 뛰고 있는 나는 커서다.

지나간 나는 내가 만든 이야기 속의 주인공이다. 지금, 여기에서 생생하게 살아 있는 것이 나다. 나는 매 순간 삶의 처음이자 끝에 서 있다.

나, 너, 적과 친구들...온 세상을 담아낼 수 있는 바탕 화면 위에서 ‘다음은 뭐지?’ 깜빡거리고 있는 나는 커서다.

타닥타닥, 나는 아무도 걷지 않은 하얀 눈밭을 걸어갔다. 지나갈 때마다 늘어나는 바탕화면은 끝없이 이어질 것이다. 가만히 있어도 생생하게 맥박 뛰며 살아 있는 나는 커서다.

 

 






 최서윤
『소설과 사상』으로 등단
  창작집‘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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