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계수 발행인
지난달 민중총궐기대회 와중에서 보성의 농민 백남기씨가 경찰이 머리를 정조준해서 쏜  물대포를 맞고 쓰러진 뒤 한 달이 지났다. 집회 장소 주변으로 겹겹이 쌓인 경찰차벽을 영상으로 보고 당일 시위가 치열할 것이라는 예상은 했지만 시위 과정에서 연로한 농민 한 분이 쓰러져 의식을 잃는 불상사가 기어코 발생하고 말았다. 일을 핑계로 젊은 사람으로서 마땅히 있어야 할 곳에 가지 못했다는 자책감이 일었다. 잠시 후 그 분이 몇 번 뵌 적이 있는 이 지역 농민으로 알려지면서 죄스런 마음을 가누기 힘들다.

그분은 사고 직후 세간에 알려진 대로 민주화 운동과 농민운동의 숨은 일꾼이었다. 유신체제 하에서 대학을 다니면서 민주화 운동에 매진하다 두 차례 제적되고, 80년에 복교되어 총학생회를 재건하고 서울의 봄 때 수많은 대학생을 이끌고 서울역에 집결했다. 이후 계엄이 확대되면서 기숙사에서 체포되어 고문과 옥고를 치른 후 고향 보성으로 내려와 농사를 지으면서 농민운동에 투신하게 된다. 가톨릭농민회에 가입한 그는 농협민주화와 수세 폐지, 농산물 제값 받기 운동에 적극 참여하였다. 그런 가운데 수입밀에 의해 우리의 밀농사가 무너진 것을 보고 ‘우리밀살리기운동’을 전개한다. 1992년에 전국농민회가 결성되자 기존의 농민생존권 및 제도 개선 투쟁은 새로 결성된 전농이 맡고, 가톨릭농민회는 평화·생명·공동체운동 쪽으로 방향을 전환하면서 농민운동 안에서 분화와 발전이 이루어짐에 따라 그분은 우리밀 살리기와 농민공동체운동을 계속해 오고 있었다.

내가 몇 번 뵈었던 그분은 기백이 높고 호방하며 매우 낙천적인 사람이었다. 또한 성품이 강직하고 인정이 많아 인근 고흥과 보성에서 농민 운동을 함께 했던 사람들은 모두 그분을 맏형으로 따르면서 과거의 일화를 떠올리기도 한다. 엄혹하던 시절에 농민 집회 때는 현장에서 끝까지 남아 있다가 백골단에 잡혀 두들겨 맞고 나오기가 일쑤였다고 한다. 그만큼 약삭빠르지 못하고 우직했다는 말이다. 지역에서 농민들 모임이 있을 때면 항상 막걸리를 빚어 와서 함께 나누며 긍정적인 기운을 북돋기도 했다고 한다.

궐기대회 이후 종편을 비롯한 보수 언론과 수구 논객들은 물 떠난 고기가 물을 만난 듯하다. 시위대의 폭력성을 부각시키며 종북몰이로도 모자라 폭도로 매도하고 배후 조종에 의해 움직이거나 판단능력이 부족한 사람들로 비하·조롱하면서 발본색원하라고 외친다. 이에 부응하듯 정부는 테러방지법, 복면착용금지법 등의 제정을 운운한다. 대통령은 시위대를 폭력과 잔인함의 상징이 되고 있는 이슬람국가(IS) 조직원에 비유함으로써 외국 언론으로부터도 비판의 도마 위에 오르게 되었고, 급기야 조계사에 피신해 있는 민주노총 위원장을 경찰력을 동원해서 체포하고 그를 비롯한 지도부에게 30년 가까이 사문화됐던 형법상의 소요죄를 적용할 것을 검토하고 있다. 집회에 참가했던 노동자와 농민들이 물대포와 최루액을 마다 않고 외치고 요구한 내용은 오간 데가 없다.

경찰 수뇌부는 백남기 농민에 대해 인간적으로는 미안하지만 법적으로 사과할 수는 없다며 과잉진압이 아니라고 강변한다. 법은 인간에게 봉사하기 위한 것일진대 이들에게 법은 인간 위에 있다. 사람을 뇌사 상태로 만들어놓고도 과잉진압이 아니며 공식적으로 사과할 일이 아니라면 그들 눈에 국민은 무엇인가. 정부에게 노동자와 농민, 그리고 그들을 대변하고자 했던 시위대는 이제 비국민을 넘어 이 사회에서 척결해야 할 적으로 간주되고 있다. 미워하면 닮게 될까 두려워 차마 미워할 수 없다. 측은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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