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성호의 ‘식민지 유산 ’의 한국현대사<9>

▲ 강성호
순천YMCA 간사
식민지 유산의 핵심은 파시즘 경험이다. 해방 이후 형성된 극우반공체제는 식민지 파시즘의 재생산을 가능하게 만든 구조적 요인이었다. 따라서 이승만~박정희로 이어지는 독재체제에는 식민지 파시즘이 중요하게 작동하였다. 이 글의 목표는 한국현대사에서 재현된 식민지 파시즘을 살펴보는데 있다.

앞서 필자는 양주삼 목사의 친일과 납북,『한국기독교해방십년사』판매금지 사건을 다루면서 ‘기억’의 문제를 다루었다. 미완의 과거사 청산이 역사에 대한 기억을 어떻게 왜곡하고 억압하는지를 보여주기 위함이다. 다만, 특정 종교(개신교)에 한정된 이야기라는 점에서 독자들의 양해를 구할 필요가 있겠다. 필자는 대학원에서『이승만 정권과 한국개신교의 정교유착』을 주제로 학위논문(석사)을 썼기 때문에 한국개신교사를 이야기하는 게 편하다. 그나마 필자가 쉽게 다룰 수 있는 대상이라는 걸 기억해주었으면 한다.

3당 합당(1990) 이후 주류로 편입한 YS는 1992년 12월 대선에서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문민정부를 내세운 김영삼 정권은 하나회 해체, 금융실명제 시행 등 일련의 개혁적인 조치를 취했다. 이러한 흐름에서 김영삼 정권은 ‘역사 바로 세우기’라는 화두를 던졌다. 김영삼 정권은 12․12쿠테타로 집권하고 오월의 광주를 짓밟은 신군부 세력을 법정에 세웠다. 조선총독부 건물을 해체한 사건 역시 역사 바로 세우기의 일환으로 진행하였다. 반민특위(1949)와 4월 혁명(1960)에 이어 과거사 청산에 대한 열기가 후끈 달아오른 시기라 할 수 있다.

충북 청주의 3․1공원에서 발생한 정춘수 목사 동상 철거사건은 역사 바로 세우기에 대한 시민사회의 요구가 관철된 사건이었다. 이 사건은 한국 개신교의 역사뿐만 아니라 시민운동사에서도 특기할만하다. 청주의 3․1공원은 1919년 독립선언서에 서명한 33인 가운데 충북 출신 인사 6명의 동상을 건립한 곳이다. 여기에는 손병희를 비롯하여 신석구, 권동진, 권병덕, 신홍식의 동상이 세워져있다. 나머지 1명의 동상은 1996년 2월 시민단체에 의해 철거되었다. 그 주인공은 바로 감리교회의 제4대 감독(대표)까지 지냈던 정춘수 목사였다.

▲ 1996년 2월 8일 청주3ㆍ1공원에서 정춘수 목사의 동상이 철거되고 있는 모습이다. (출처: 1996년 2월 9일자 경향신문)

충북 청주가 고향인 정춘수 목사는 전시체제기(1937~1945)에 감리교회의 전쟁협력을 적극적으로 주도한 인물이었다. 1938년 흥업구락부 사건을 계기로 전향성명서를 발표한 정춘수 목사는 제4대 감독으로 취임한 이래 국민정신총동원 조선감리교연맹, 조선임전보국단, 조선전시종교보국회 등 전쟁협력단체의 간부로 활약하였다. 해방 이후 반민특위에 검거되어 조사를 받은 건 당연한 일이었다.

정춘수 목사의 동상은 3․1공원이 조성될 때부터 논란이 되었다. 그의 동상 건립에 대한 부적절성이 제기되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충청북도는 3․1공원이 3․1운동에 대한 역사적 사실‘만’을 기념하기 위한 공간이므로 민족대표 33인을 기념하는데 특정인을 배제할 수 없다는 논리를 내세웠다. 인물 평가에 대한 시한과 공간을 1919년으로만 국한하자는 입장이었다.

하지만, 1987년 민주화 이후 등장한 시민사회는 이러한 논리와 역사의식에 도전을 걸었다. 1994년 10월에 출범한 충북지역사회민주단체연대회의(이상 연대회의)는 자신들의 첫 사업으로 정춘수 목사의 동상 철거를 목표로 삼았다. 이는 1993년 충북역사정의실천협의회가 전개한 ‘친일화가 김기창 기념관 건립 반대운동’의 연장선상에 있었다.

연대회의는 정춘수라는 친일파를 독립운동가로서만 규정한 채 동상을 세운 일은 올바른 역사를 세우는데 걸림돌이 된다고 보았다. 따라서 정춘수 목사의 동상을 철거해야 한다고 주장하기 시작했다. “광복 50주년을 맞아 민족정기를 바로 세운다는 취지에서 친일행각을 벌인 정춘수의 동상은 반드시 철거돼야 한다”는 것이었다.

많은 논란 끝에 결국 정춘수 목사의 동상은 철거되는 방향으로 결정되었다. 그러나 정작 철거와 관련해서 청주시와 충북도청은 서로 책임을 회피하며 차일피일 미루었다. 참다못한 연대회의는 1996년 2월 8일 정춘수 목사의 동상을 철거하기 위한 직접행동에 나섰다. 연대회의는 2․8독립선언 77주년에 맞춰 철거 작업에 착수하였다. 연대회의가 직접 행동에 나서자 청주시는 경찰 병력을 동원하였지만 큰 싸움은 일어나지 않았다. 경찰은 명분 없는 일에 끼어들지 않겠다며 옆에서 지켜만 보았기 때문이다. 이는 민원인들의 집단행동을 물리적으로 막기 위한 행정 기관의 병력 동원 요청을 경찰이 거부한 이례적인 사례라고 한다.

이 날 연대회의는 정춘수 동상의 목에 일장기를 두르고 밧줄을 걸었다. 동상은 시민들이 잡아당기는 힘을 이기지 못하고 목이 부러진 채 산산 조각나 버렸다. 이 사건은 민주화 이후 등장한 시민사회가 종교계의 과거사 청산 문제를 건드렸다는 점에서 특징적이다. 이 사건을 계기로 친일파 공덕비 철거, 친일재산 환수 등이 이루어지기 시작하였다. 이후 정춘수 목사의 동상이 있던 자리에는 횃불조각이 세워지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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