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성호의 ‘식민지 유산 ’의 한국현대사<8>

▲ 강성호
순천YMCA 간사
반민특위 와해 이후 친일문제는 금기의 역사가 되었다. 1966년 임종국이라는 재야학자에 의해『친일문학론』이라는 책이 출간되기 전까지 친일문제는 사회적 침묵을 강요당했다. 그러다보니 1950년대 후반에 한 교회사학자가 쓴 책이 장로교회에 의해 판매 금지를 당한 사건이 벌어지기도 했다. 주인공은 바로 매산 김양선 목사. 숭실대의 기독교박물관을 세운 저명한 학자이자 목회자였다.

김양선 목사는 생전에 ‘전래, 선교, 부흥, 수난, 재건’이라는 5가지 프레임으로 한국기독교의 역사를 재조명하는 기획을 세운 적이 있다. 쉽게 말해 한국기독교의 역사 5부작이다. 김양선 목사는 1956년에『한국기독교해방십년사』라는 책을 출간했다. 제목 그대로 해방 10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지난 10년의 역사를 정리한 것이다. 이 책은 그가 구상한 5가지 프레임 중 ‘재건’에 속하는 것으로 역사가들이 좀처럼 취급하기 꺼려하는 당대사(1945~1955)를 다루었다. 문제는 여기에서 시작되었다.

출간된 지 1년이 지난 시기에 김양선 목사가 소속된 장로교회는 『한국기독교해방십년사』에 문제가 있다고 보았다. 책의 내용이 사실 관계에 위반되고 총회를 비난하는 내용이 많다는 이유에서다. 장로교회는 조사위원회를 꾸려 책의 문제가 무엇인지를 살펴보게 했다. 이들은 1년 동안의 조사를 거친 후『한국기독교해방십년사』가 11가지의 문제점이 있다고 보고했다. 하지만 사실상 단 하나로 귀결될 수 있다. 바로 ‘친일 문제’였다.
 
이 책에서 다루고 있는 1954년 안동총회의 신사참배 취소 성명 사건을 보자. 김양선 목사는 책을 통해 “1954년 제38회 총회는 출옥성자 이원영 목사의 총회장 된 것을 계기로 신사참배 결의를 재삼 취소하였다. 그러나 이것은 도리어 총회가 신사참배의 범과(犯過)를 통절(痛切)히 뉘우치지 못하였다는 증거 이외에 아무것도 아니었고, 일부 교권주의자의 자기 명예를 위한 제스처에 불과한 것이었다”고 비판했다(53쪽). 김양선 목사는 장로교 총회가 1948년에 이미 신사참배 취소를 결의한 적이 있는데, 왜 굳이 1954년에 거듭 취소했는지 알 수 없다고 밝혔다. 1954년 신사참배 취소 결의의 진정성을 역사가로서 의심한 것이다.

총회의 조사결과에 대해 김양선 목사는 “과거의 공식적인 취소가 있었음에 불구하고 그것을 생각하지 않고 취소를 거듭하게 만든 어떤 사람이 있었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었다고 한다. 여기서 김양선 목사는 그 사람이 누구인지를 명확히 밝히고 있지 않지만, 책에서 서술한 교권주의자가 곧 친일인사들 임을 어렵지 않게 알 수 있다. 

그렇다면 문제가 된 1954년 안동총회에서는 무슨 일이 있었을까? 어떤 이유로 총회와 김양선 목사가 대립했을까? 1954년 안동총회가 개최될 때 장로교는 신사참배 문제로 고신교단과 이미 분열된 상태였다. 장로교는 이어지는 분열을 막기 위해 여러 가지로 대책을 강구해야 했다. 특히 1954년은 한국전쟁이 휴전한 지 1년이 지난 시점이었는데, 당시 기독교 지도자들은 신사참배 문제가 전쟁과 분열을 낳았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다보니 과거사 청산에 대해서 무엇인가 하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이었다. 이러한 맥락에서 안동총회는 신사참배 취소성명을 발표했다고 볼 수 있다.

안동총회의 신사참배 취소성명은 처음에 적극적인 친일인사에 대한 처벌을 한다는 내용까지 포함되었지만, 곧 내부의 반발에 의해 무산되었다. 대신, 처벌이 생략된 채 일정 기간 동안 자숙할 것과 유족들에게 위문금을 보내자는 온건한 방식만 채택되었다. 아무도 책임지지 않은 채 형식적이고 표면적인 절차와 방법이 시행된 것이다. “자기 명예를 위한 제스처에 불과”했다고 한 김양선 목사의 지적은 이런 부분을 염두에 둔 것이다.

거기에다 더 큰 문제는 과거사 청산의 초점을 ‘신사참배’로 맞추다보니 한국기독교가 일제의 침략 전쟁에 적극적으로 협력한 일에 대한 논의가 전혀 이루어지지 않았다. 전시체제기(1937-45)에 한국기독교는 국방헌금을 걷는다거나 교회 기물 등을 헌납해 전시동원체제의 충실한 협력자로 활동했다. 한국기독교는 신사참배라는 ‘배교’뿐만 아니라 종교보국이라는 ‘전쟁협력’을 저질렀다. 그런데 이 문제에 대해서는 전혀 다루지 않았다. 철저한 과거사 청산이 이루어지지 않은 것이다. 그리고 이 신사참배 취소성명은 한국기독교의 철저한 반성을 이끌어 내지도 못했다.

또 김양선 목사는 신사참배를 반대했다는 이유로 제명당한 적이 있는 한부선(Bruce F. Hunt) 선교사의 해벌 사건을 다루면서 장로교 총회의 처신을 비판하기도 했다. 한부선 선교사는 일제 시기 만주에서 신사참배를 반대했다는 이유로 투옥되어 고생을 하다가 미국으로 추방당했다. 1939년 9월 봉천노회는 한부선 선교사가 신사참배를 거부했다는 이유로 그를 제명해버렸다.

해방 이후 한국으로 돌아온 한부선 선교사는 고려신학교의 교수가 되었다. 그는 1947년 장로교 총회에 참석할 때 자신의 이름이 불려지자 “나는 총회의 회원이 아닙니다”라고 대답하면서 교계에 미묘한 파문을 일으켰다. 이 사건은 친일문제를 청산하지 못한 한국기독교의 실태를 간접적으로 건드린 것이다. 장로교 총회는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그의 제명 처분을 취소하겠다는 해벌 조치를 취했지만, 어떠한 사과나 반성을 하지 않았다. 여기에 대해 김양선 목사는 장로교 총회가 “거듭 과오를 범하였으니 신사불참배를 이유로 하는 한 선교사의 제명처분 건은 해벌로써 해결될 것이 아니라 총회의 전비(前非)를 취소 사과함으로써만 해결될 성질의 것”이라고 평가했다. 한부선 선교사의 해벌과 관련하여 장로교 총회의 처신이 잘못되었다는 비판이다. 본질적인 문제에 대한 해결 없이 겉으로 드러난 현상을 수습하는데 급급한 한계를 지적했다.

친일인사들이 교권을 잡고 있던 당시의 장로교회는 이 책을 반가워했을 리가 없다. 그 결과 1958년 제43회 총회는『한국기독교해방십년사』가 총회를 비난하고 11가지의 모독내용이 있기 때문에 ① 종교교육부 관계 책임자는 총회 앞에 크게 사과하게 하고, 교육부로 하여금 비난 모독적인 기사에 대한 정정 또는 해명서를 지상에 발표하고 ② 정정 출판 이전에는 판매를 허락하지 않기로 하고 ③ 저자 김양선 목사는 총회석상에서 사과하기로 한다는 결정을 내렸다. 여기에서 종교교육부 관계자가 책임을 지는 이유는 이 책의 발행 책임자였기 때문이다. 

『한국기독교해방십년사』판매금지사건은 한국기독교 내부에서 친일문제를 더 이상 공론화하지 못하게 만든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공식적으로 한국기독교의 친일문제는 일제의 강요에 의한 타율적인 행동으로만 기억되기 시작했으며, 1954년 안동총회에서 이루어진 신사참배 취소성명의 문제점에 대한 비판과 의심도 묵살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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