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성호의 ‘식민지 유산 ’의 한국현대사<7>

▲ 강성호
순천YMCA 간사
해방 후 친일세력은 반공 이데올로기를 적극적으로 활용하여 생존을 도모했다. 남한을 뜨겁게 달군 신탁통치 파동은 친일파의 역습을 가능하게 만든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친일세력은 반공의 논리를 전가의 보도로 휘두르기 시작하였다. 이는 분단과 전쟁을 거치면서 더욱 강화되었다. 여순사건을 계기로 제정된 국가보안법은 반공의 내재화와 검열의 일상화를 수반하였다. 정부가 수립된 지 1년도 되지 않은 때 발생한 일련의 사건은 극우반공체제의 골격을 마련하는데 중요한 기반이 되었다. 여기에 친일세력이 앞장선 것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이런 과정을 거치면서 남한 사회는 우향우의 집단으로 굳어져갔다. 지금까지도 말이다.

앞에서 필자는 친일의 문제를 인적 청산으로만 보지 말자고 했다. 식민지 유산의 핵심은 전시체제기에 경험한 파시즘이기 때문이다. 거대한 집단성을 맹목적으로 추종하게 만드는 파시즘은 일제 잔재의 청산을 위한 본질적인 대상이다. ‘민족’이나 ‘국가’라는 거대한 틀과 자신을 동일시하게 만드는 파시즘은 ‘주체로서의 개인’을 철저히 부정한다. 동시에 파시즘은 ‘거대한 개인(영도자)’만을 비판적 성찰 없이 받아들이게 한다. 이러한 경향은 이승만의 일민주의를 비롯해서 1980년대 운동권 진영까지 아우르며 전개되었다. 식민지 유산이 구조적이고 체제적인 차원에서 작동한 결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필자는 해방 후 친일파의 역습에 대해서 다루었다. 신탁통치 파동→국가보안법 제정→반민특위 습격→국회프락치 사건→김구 암살 등으로 이어지는 친일파의 역습은 극우반공체제의 형성으로 귀결되었다. 분단-전쟁의 과정을 거치며 강화된 극우반공체제는 식민지 유산의 재생산과 아주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다. 국가보안법의 제도화라 할 수 있는 극우반공체제는 파시즘의 귀환이었다. 친일세력이 지배 엘리트를 구성하면서 식민지 유산의 작동은 더욱 구조화되었다.

극우반공체제는 근대 국민국가의 희생자 숭배를 철저히 시행했다. 근대 이후 전쟁의 희생자를 기리는 일은 국민국가를 유지하기 위한 필수적인 행위가 되었다. 근대 국민국가는 국민들의 자발적인 동의와 소속감을 절실히 필요로 했기 때문이다. 각종 전쟁기념비와 사적지 등의 마련은 이러한 사정에 근거한다.

전쟁에 대한 기억은 국가 정체성의 형성에서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한다. 전쟁은 정치의 연장선상이다. 극우반공체제는 한국전쟁에 관한 공식화된 기억을 통해 반공주의를 일반화하였다. 전쟁에 대한 남한 지배세력의 독점적 해석은 하나의 지식권력으로 작동하였다. 여기에서 ‘납북’은 한국전쟁에 대한 공식적인 기억을 강화하는데 큰 역할을 담당한다. 납북은 한국전쟁 당시 북한군에 의해 강제적으로 끌려간 경우를 말한다.
<6․25전쟁 납북인사 가족협의회>의 공식 인터넷 홈페이지에 따르면, 1950년 서울에서 납북된 인사가 2438명에 달한다고 한다. 이들은 전쟁을 통해 새롭게 탄생한 집단 중 하나인 ‘이산가족’으로서 극우반공체제를 입증하는 타자적 존재로 사용되었다(김귀옥, 2010).

한국전쟁 발발 당시 적지 않은 기독교 인사들도 북한군에 납치되었다. 기록에 따라 55명, 77명 등 의견이 분분하다. 특징적인 점은 대부분 한국교회의 지도자급 인물이라는 사실이다. 이 중에는 1930년대 감리교회를 대표하던 양주삼 목사도 포함되었다. 앞에서 살펴보았듯이 그는 징병제를 찬양하는 논설<正義の必勝と吾人の覺悟>를 쓰면서 일제의 침략전쟁을 적극적으로 지지하고 지원하였다. 그래서인지 해방 후 양주삼 목사는 한국기독교의 대표적인 친일목사로 평가되었다. 한 예로, 건국준비위원회가 미군에 전달한 친일파 명단에는 윤치호, 박흥식 이외에 양주삼 목사가 포함되었다. 조선공산당의 팜플렛에도 이용설, 구자옥 등과 함께 대표적인 친일파로 거론되었다. 1949년 친일파 처단을 위해 만들어진 반민특위의 검거 대상이었음은 물론이다.

하지만, 납북 이후 그에 관한 공식적인 기억은 그의 전쟁협력(친일)에 대해서 생략하는 방식을 취했다. 그의 친일 문제는 쏙 빠지고 대신 납북이 강조되었다. 양주삼 목사에 대한 본격적인 전기물인 <그의 나라와 그의 생애>(이호운 저, 1965년 발행)을 보자. 이 책은 양주삼 목사를 만주 선교의 개척자이자 통합된 감리교회를 이끈 탁월한 행정가로 묘사하는데 방점을 둘 뿐이다. 심지어는 해방 후 반민특위에 검거된 사실에 대해서도 서술하지 않았다. 책의 후반부에서 저자는 6쪽에 걸쳐 그의 납북 사실만을 강조하였다. 친일과 납북. 여기에는 복잡 미묘한 관계가 얽혀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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