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송태웅 시인
용두로 이사 와서 보니 전에 살던 사람이 놔두고 간 냉장고 하나, 세탁기 두 대가 있었다. 모두 다 LG가 아니고 GoldStar도 아니고 금성이었다. 냉장고는 한 번 열었다 하면 악취 때문에 머리가 아플 지경이었고, 욕실에 있는 세탁기는 전원만 들어오고 움직일 줄 몰랐다. 집 앞 수돗가에 있는 세탁기를 행여나 하고 돌려봤더니 탈수 단계에서 세탁기가 우당탕탕 소리를 내며 요동을 쳤다.

지인이 와서 함께 냉장고를 밖으로 들어내 왁스로 물청소를 했다. 하룻동안 냄새를 뺀 다음 전원을 넣어보았더니 이것도 세탁기와 다를 바 없이 참을 수 없는 소음을 냈다. 냉장고라기보다는 무슨 오래된 공장의 기계와 같았다.

인터넷을 뒤져 보았더니 대형폐가전 수거 무료서비스라는 게 있어서 욕실에 있는 세탁기와 냉장고를 가져가라고 입력했더니 돌아오는 수요일에 가져간다고 했다. 대한민국이라는 난장판에서 이런 건 아주 잘하는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괜히 지인만 고무장갑도 안 끼고 냉장고 청소하느라 헛심 썼네. 막걸리 한 잔.

LG서비스에 연락해서 밖에 있는 세탁기의 탈수 고장을 고쳐달라고 했더니 나는 출근해 있는데, 수리기사가 혼자 와서 고치고 갔다. 출장비 포함해서 고치는 비용 6만 2000원. 중고세탁기 사는 거보다는 훨씬 적게 들었다. 막걸리 크게 두 잔.

이제 문제는 냉장고이다. 이사하고 어쩌고 하느라고 내 주머니는 이미 고갈이 나 있었다. 고민 끝에 선배에게 전화를 했다. “형, 나 중고 냉장고 한 대 사 줘요.”

그 선배는 아무 말도 않고 “그러자”고 했다. 막걸리 크게 석 잔.

금요일 섬진강변 한옥에서 홀로 일주일을 보낸 선배가 순천의 집으로 주말을 쉬러(?) 갈 때 간전면사무소 앞에서 만나 산을 넘어 순천으로 중고 냉장고를 사러 갔다. 요한이네 할인마트, 그 옆에는 영성중고가전점이 있었다. 이건 뭔가. 중고 가게는 모조리 기독교 계통? 내가 인터넷을 뒤져 찾아본 중고가게는 은혜중고가전이었다. 요한, 영성, 은혜…. 그래 맞다. 신상품을 살 수 없는 가난한 또는 홀로 사는 인생들에게 중고처럼 좋은 게 어디 있겠는가. 요한이 복음을 내려 영성을 우리에게 주시어 은혜로운 생명을 얻으리라. 믿사옵니다. 결국 영성중고가전점에서 쓸 만한 냉장고를 22만 원에 샀다. 구례까지 운반비용 3만 원 추가. 총 25만 원을 선배가 카드로 긁었다.

냉장고의 전원을 넣기 전에 락스로 냉장고의 안팎을 박박 닦았다. 반짝반짝 빛이 났다. 전원을 넣어도 마치 아무것도 없는 것처럼 아주 조용했다. 냉장고를 사 준 선배에게도 은혜와 영성이 복음처럼 내려오기를. 쥔집 아주머니가 준 감자, 된장, 김치를 넣고 담양에 사는 형이 준 김치 한 통, 또 다른 지인이 준 감자, 양파, 청국장, 고추, 양파를 냉장고에 넣으니 마음이 여간 뿌듯한 것이 아니었다. 역시 사람은 좀 갖추고 살아야 해.

다음날 아침에 일어나 압력솥에 밥 짓고, 3분 육개장에 감자를 썰어 넣고, 고추장을 풀고, 텃밭의 청양고추, 파를 넣고 끓여 내서 냉장고의 문을 아주 익숙한 듯이 열어 작년 겨울 김장김치를 꺼내 아침을 후다닥 먹어 치웠다. 그 3분 육개장에 아무것도 넣지 않고 그냥 끓이면 조미료 냄새 때문에 절반도 먹지 못했을 것이다. 삶이 역겨워 죽겠는데 먹는 것까지 역겨우면 어찌 살아가겠는가. 담배를 한 대 피워 물고 변기에 앉아 잠깐의 명상을 즐겼다. 삶은 나만의 것이면서 또 나만의 것만도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 세상에 스쳐간 모든 생명체들의 인연과 연기와 분투와 인내 끝에 이 짧은 이승의 시간이 내게 온 것 아니겠는가. 고맙다. 내 곁의 모든 생명 있는 것들. 모든 사물들이여. 복음으로 영성으로 은혜롭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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