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성호의 ‘식민지 유산 ’의 한국현대사<6>

▲ 강성호
순천YMCA 간사
이승만과 박정희는 집권한 지 6년 만에 영구집권을 위한 개헌을 필요로 했다는 공통점이 있다. 집권 연장을 위해서는 헌법을 바꿔야 할 시점이었기 때문이다. 공교롭게도 이때마다 국회의원 선거가 시행되었다. 헌법을 자기 입맛대로 바꾸려면 국회의원 3분의 2 이상을 확보해야 하는 법. 이승만과 박정희는 영구집권을 위해 대대적인 부정선거를 자행하였다. 그 결과 1954년의 5․20총선은 ‘곤봉선거’라고 불렸고, 1967년의 6․8총선은 ‘망국선거’라고 일컬을 정도였다.

1954년 5․20총선은 한국정치사에서 최초로 ‘여당’이 참가해 치른 선거라는 특징이 있다. 경찰의 곤봉이 당락을 결정했다고 해서 붙여진 곤봉선거에 최초로 여당이 참가했다는 사실이 흥미롭다. 전쟁 기간에 조직된 자유당은 이승만의 실질적인 여당이었다. 역설적인 건 독립운동에 참여한 이범석의 족청계가 자유당의 조직을 주도했다는 점이다. 5․20총선 결과 자유당은 36.8%의 득표율 밖에 얻지 못했으나 무소속 당선자를 끌어들여 개헌선을 확보할 수 있었다.

한편, 5․20총선은 자유당 내 세력변화에 큰 영향을 미쳤다. 이때 이범석의 족청계는 이승만에게 토사구팽을 당한 상태였다. 족청계 제거 이후 자유당 내 기독교 인사들은 주도권을 둘러싼 각축을 벌였다. 그 결과 감리교회의 권사 이기붕이 원로세력인 배은희 목사와 이갑성을 제치고 당권을 장악하게 되었다. 이로써 이승만과 이기붕을 두 축으로 하는 후기 집권체제가 출범하게 되었다.

주목할 점은 이승만 대통령이 5․20총선이 시작될 때 “친일파에 대해서 오해가 많은가 본데 오해하면 안 된다”, “일제 때에 아무리 악질적인 행위를 했어도 그 사람이 지금 나라를 위해서 좋은 일을 하면 그 사람은 훌륭한 사람이다. 그러니까 친일파라고 공격해선 안 된다”는 담화를 발표했다는 사실이다(서중석, 2008).

이 말의 요지는 조국에 충성을 다하는 반공주의자라면 과거를 덮자는 것이다. 더 정확하게 얘기하자면, 이승만 대통령은 5․20총선에 상당수의 친일파들이 자유당 후보로 입후보하자 이들을 요직에 앉히기 위해 과거를 덮자는 담화를 발표했다. 결국, 1954년 5․20총선 이후 친일파들은 국무위원과 자유당 간부의 요직을 다수 차지하게 되었다. 물론 그전에도 친일파가 장관이 된 경우가 꽤 많았다. 하지만 전체적으로는 소수였고, 친일행위의 수준도 심한 편이 아니었다. 다시 말하자면, 5․20총선을 계기로 친일파들은 정계에 대거 참여하게 되었다. 이러한 점에서 이승만 정권의 후기는 ‘친일파 관료의 집권시기’이기도 했다.

반공과 독재는 친일의 면죄부로 작용하였다. 분단체제 하에서 반공 이데올로기는 끊임없는 위기담론으로 외부의 적을 상정할 뿐 내부의 문제를 돌아보지 못하게 했다. 1960년 3․15부정선거가 치러질 때 장관 11명 가운데 9명이 친일행위가 분명했고, 차관 12명 가운데 10명도 친일파 출신이라는 사실은 무엇을 말해주는가. 5․20총선 이후 자유당은 이승만의 영구집권을 보장하는 개헌안을 통과시키려 했다. 투표 결과 1표 차이로 부결이 되었다. 하지만 경무대의 해석은 달랐다. 이승만 정권의 프로파간다(Propaganda) 역할을 담당한 갈홍기 공보처장(감리교 목사)은 사사오입의 논리로 부결된 개헌안을 억지로 통과시켰다. 이것이 바로 한국 헌법의 두 번째 개정판인 ‘사사오입 개헌’이었다. 전시체제기에 <대화세계>라는 월간지의 기자로 활약하며 황민화 정책을 홍보한 갈홍기 목사가 이승만의 영구집권을 보장하는 개헌의 정당성을 강조한 것이다. 친일과 독재의 연결고리에 의미심장한 상징적인 사건이다.   



해방 70주년이 되었지만 친일 논쟁은 여전하다. 이는 식민지 유산을 완전히 청산하지 못한 까닭이다. 그렇다면 식민지 유산이 무엇이기에 70년이 지난 지금도 영향을 미치는 것일까.

먼저, 식민지 유산의 청산에 대한 논의는 지금까지‘친일파 처단’이라는 인적 청산으로 초점이 모아졌다. 그러나 식민지 유산은 이보다 더욱 구조적이고 체제적인 차원에서 고민해 볼 필요가 있다. 식민지배의 경험을 통해 우리는 국가주의적 사고방식과 행동방식을 체득했고, 이것이 남북한 체제의 정체성을 구성하는 데 중요한 요인으로 작용했다.

식민지 유산은 한국현대사를 결정짓는 구조적 요인이다. 해방 이후의 역사는 식민지 시기의 역사와 연속성을 가지고 있다. 해방 이후의 역사는 식민지 유산을 토대로 작동하고 있다.

성균관대학교에서 사학을 전공한 강성호 씨의 글을 통해 식민지 유산이 구체적으로 우리나라 현대사에 어떤 영향을 미치고 있는지 살펴보는 기회를 갖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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