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성호의 ‘식민지 유산 ’의 한국현대사<5>

▲ 강성호
순천YMCA 간사
지난 호에 국가보안법의 제정(48.12.1)을 통한 국가보안법 체제의 등장을 이야기했다. 이분법적 세계관에 기초한 국가보안법 체제는 분단체제의 강화에 큰 영향을 발휘했다. 여순사건 이후 이승만 대통령은 북을 항상 ‘북괴’로 지칭할 것을 지시했으며, ‘동족상잔’이라는 표현도 금지했다. 친일파 이종형이 운영하는 극우신문『대한일보』는 반민특위에 참여한 국회의원들을 ‘공산당의 앞잡이’로 표현하며 공격하기 일쑤였다. 그러나 정부수립 후 약 열 달이 지난 시점까지 국가보안법 체제는 중앙정치에 쉽게 뿌리를 내리지 못했다. 무엇보다 제헌국회는 ‘소장파 전성시기’였고 김구와 김규식이 건재했기 때문이다.

‘1949년’은 일반인에게 낯선 시기다. 1948년 8월과 1950년 6월 사이에 위치한 1949년은 현대사의 무주공산에 가깝다. 그러나 국가보안법 체제의 형성과 관련하여 ‘1949년’은 무척이나 중요하다. 특히 1949년 6월에는 남과 북에서 많은 변화가 일어났다. 먼저, 북에서는 조선노동당이 출범하여 남과 북의 좌익정당이 하나로 귀결되었다.

남한의 경우 무엇보다 주한미군이 1949년 6월에 철수하였다. 애치슨 라인과 함께 남침유도설의 주요 근거가 된 주한미군의 철수는 사실 남한에 정부가 수립되면서 미군이 주둔할 명분이 사라졌기 때문에 일어난 일이다.

한편, 1949년 6월 5일에는 국민보도연맹이 조직되었다. 여기에는 좌익 활동을 했거나 동조한 경험이 있는 인물들이 가입하였다. 이들은 국민보도연맹을 매개로 국가의 감시를 받게 되었다. 더 큰 문제는 한국전쟁의 발발과 함께 전국적이고 조직적인 민간인 학살이 국민보도연맹을 통해 전개되었지만 말이다.

이와 함께 1949년 6월에는 국가보안법 체제의 강화 움직임이 두드러지게 나타났다. 이러한 움직임 속에서 반민특위 습격사건(6.6), 국회프락치 사건(6.20), 김구 암살사건(6.26) 등 이승만 정권의 역습이 일어났다. 연쇄적으로 발생한 이 세 사건을 보통 ‘6월 공세’라 부른다. 그런데 이 세 사건은 6월에 갑자기 발생했다고 보기 어렵다. 오히려 그 이전에 준비해왔던 일이 6월에 분출되었다고 할 수 있다. 반민특위에 대한 이승만의 분노는 2~3월에 있었고, 일부 소장파 국회의원에 대한 체포는 4~5월에 이루어졌고, 김구 살해도 치밀히 계획된 일이기 때문이다.

반민특위 습격사건은 1949년 5월 17일경을 전후하여 세 명의 국회의원이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구속된 일과 연관 지어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이들 중 한명인 이문원 의원은 정부가 UN대표로 “친일행위가 가장 많은” 김활란을 보낸 일을 비판한 바가 있다. 국회는 이 세 명에 대한 석방동의안을 가결시켰는데 극우반공주의자들이 정부의 방조를 받으며 이를 반대하였다. 심지어 이들은 “반민특위는 공산당의 앞잡이다” 등의 구호를 외치며 반민특위를 비판하기 시작했다. 주목할 점은 친일파인 손홍원과 김정한이 지도하던 국민계몽회가 이를 주도했다는 사실이다. 이런 상황에서 반민특위가 친일경찰의 상징이었던 최운하를 체포하자 경찰은 반민특위를 습격하였다.

이 사건에 뒤이어 헌병사령부는 김약수, 노일환 등 7명의 국회의원들을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체포하였다. 공산당의 지령을 받고 대한민국 정부를 전복하고 공산주의 정부를 세우려고 했다는 혐의다. 이른바 '국회프락치 사건'이 발생하였다. 이 사건으로 반민특위의 특별검찰관을 맡고 있던 노일환, 서용길이 구속됨으로써 반민특위의 활동은 큰 타격을 받았다.

국회프락치 사건이 본격적으로 확대될 무렵인 6월 26일 김구가 경교장에서 안두희에게 암살당한 일이 벌어졌다. 한국현대사에서 끊임없는 논쟁을 제기한 사건이 발생한 것이다. 특히 암살의 배후에 이승만과 미국이 있었는가 하는 문제는 초미의 관심사라 할 수 있다.

그런데 김구는 해방 이후 1947년 12월까지 이승만의 가장 가까운 파트너로 지낸 적이 있다. 이 둘의 관계는 반탁운동을 통해 더욱 긴밀한 관계를 유지한 측면이 있다. 하지만 단독정부의 수립 문제가 떠오르자 이 둘의 관계는 갈라지기 시작했다. 중요한 건 김구는 대통령을 자리를 놓고 이승만과 겨룰 수 있는 최대의 라이벌이었다는 점이다. 김구 암살 사건의 관계자들은 거의 다 친일파이기도 했다.

6월 공세는 지배체제의 걸림돌들이 배제되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이승만 대통령은 반민특위를 습격함으로써 자신의 세력 기반인 친일세력의 안정화를 구축하였고, 국회프락치 사건을 통해 사사건건 자신에게 제동을 건 제헌국회를 길들일 수 있었다. 그리고 자신의 정적인 김구가 서북청년회의 회원에게 죽임을 당했다. 6월 공세 이후 이승만 정권은 반공정책을 맹렬히 펼치며 반공극우체제의 골격을 마련하기 시작하였다. 
 



해방 70주년이 되었지만 친일 논쟁은 여전하다. 이는 식민지 유산을 완전히 청산하지 못한 까닭이다. 그렇다면 식민지 유산이 무엇이기에 70년이 지난 지금도 영향을 미치는 것일까.

먼저, 식민지 유산의 청산에 대한 논의는 지금까지‘친일파 처단’이라는 인적 청산으로 초점이 모아졌다. 그러나 식민지 유산은 이보다 더욱 구조적이고 체제적인 차원에서 고민해 볼 필요가 있다. 식민지배의 경험을 통해 우리는 국가주의적 사고방식과 행동방식을 체득했고, 이것이 남북한 체제의 정체성을 구성하는 데 중요한 요인으로 작용했다.

식민지 유산은 한국현대사를 결정짓는 구조적 요인이다. 해방 이후의 역사는 식민지 시기의 역사와 연속성을 가지고 있다. 해방 이후의 역사는 식민지 유산을 토대로 작동하고 있다.

성균관대학교에서 사학을 전공한 강성호 씨의 글을 통해 식민지 유산이 구체적으로 우리나라 현대사에 어떤 영향을 미치고 있는지 살펴보는 기회를 갖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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