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도관사마을에서 만난 사람들 3 - 송순방(83세)

올해 나이 여든셋인 송순방 씨는 고향인 고흥군 점암면에서 살다가 중매로 만난 철도직원 최영식 씨와 결혼하면서 순천 조곡동 철도관사마을로 들어오게 된다. 1954년부터 살기 시작했으니 60년을 이곳에서 살고 있는 것이다.
 

경찰은 낮에 오고 산사람은 밤에 오고

할아버지 때부터 관직생활을 했던 집안이라 크게 고생하지 않고 자랐던 송순방 씨에게도 1948년 여순사건과 그 이후의 기억은 잊을 수 없다.

“그때 군인들 파란 찦차가 꼬리에 꼬리를 물고 고흥읍으로 들어오드마. 여수 14연대가 뭔 반란을 일으켰다고 해서 말만 들었제. 우리는 뭐가 뭔지는 모르제” 라며 그때의 기억을 이렇게 이야기한다.

“산밑에 살고 전답도 없는 사람들이 모여가꼬 대창, 그놈을 메고 밥술이나 먹는다는 집에 쳐들어가 헤꼬지하고 그랬제. 우리가 생각하기에 즈그들은 너무나 가난하고 그러는데, 지방 유지란 사람들한테 천대를 많이 받았지. 민심을 못 얻은 면장집이나 관청 집은 석유를 뺑 둘러서 태워불고 그랬어. 다행히 우리집은 그렇게 심하게 당하지는 않았어. 우리 아버지가 면장도 하고 그랬는디, 우리 아버지는 욕심이 없고 자식들 교육시킨 것밖에 없어. 그랑께 해꼬지는 많이 안 당했제.”

14연대가 진압을 당한 이후에도 지방에서는 소위 ‘산사람들’의 활동이 계속됐다. 송순방 씨는 “그때는 지방폭동이 심했다”고 표현했다.

“14연대가 진압당하고 나서 그 후로 지방폭동이 더 무서웠어. 진압되고 나서도 산사람들 있잖아. 집안형편이 곤란한 젊은 애들은 싸잡아서 올라갔는디 죽었는가 살았는가 그것은 모르고. 산에 있다가 어두우면 동네로 내려와서 앙심품은 사람은 해치기도 하고, 날 밝으면 올라가불고. 경찰은 낮에 오고 산사람은 밤에 오고 심했어요.”


▲ 조곡동 중앙경로당에서 만난 송순방 씨(83세)
그때는 먹기만 하면 살아졌어

결혼하고 1년 후인 1954년에 조곡동 철도관사마을에 들어오게 된 송순방 씨는 4남매에, 순중-순고에 다녔던 친정 동생들 둘까지 여덟 식구 살림을 맡아야 했다.

“그때 당시엔 공직이라도 교통부, 체신부, 교육부가 젤로 박했어. 아들 둘이, 딸 둘이 갈치니라고 고생 많이 했어. 아랫돌 빼서 웃돌 괴고, 겨우 갈쳤어요. 광주서 방을 얻어가꼬 갈쳤는데 그때 남광주 역에 내리면 택시가 250원이여. 짐을 이고지고 하면서도 택시 한번을 못타고 그랬어. 보수가 적으니까. 외식이라고 젤 좋은 것이 짜장면 한 그릇 먹었던거고.”

순중-순고 다니는 동생들을 데리고 있었던 터라 식량은 친정에서 갖다 먹었기 때문에 다른 철도직원들보다는 형편이 조금 나은 편이었다.

“그 당시에 우리 할머니가 우리집에 오셨다 가서, 우리 아버지에게 ‘아이, 애비야. 순천 쟈는 굶어죽것다’ 그랬어요. 대농가에서 남부럽지 않게 살았는디 가서 본께 머시 없는께. 긍께 우리 아버지가 ‘월급쟁이는 원래 그런거요’ 했대. 그때는 먹을 것이 없으니까 먹기만 하면 살아졌어. 친정에서 식량을 다 대주니까 그래도 괜찮았지. 지금이 젤로 못살아.”


주택으로는 철도관사만한 데가 없어

▲ 일제강점기 흔적이 여전히 남아있는 송순방 씨 집안 내부 모습(위에서부터 미닫이문, 창문, 방안모습).
철도관사마을에서 60년을 살아온 송순방 씨에게 이곳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살기 좋은 곳이다. 자식들이 전세 내놓고 아파트에서 살자고 해도 한사코 거절한 이유가 있는 것이다.

“긍께 여기가 살기 좋은 것이, 목욕탕, 병원있었제, 운동장도 있제. 정이 들어서 그런가. 내 생각에 주택으로는 철도관사만한 데가 없어. 마을에 딱 들어오면 아늑해서 바람도 그렇게 없고, 공기도 좋고, 도로가 저렇게 반듯반듯하니 나 있는 데는 대한민국에서 그렇게 없대요. 주택가로는 이런 데가 없어요. 어디 다른 데 가서 살고 싶은 생각은 안 해봤어요. 아이고, 우리 애들 아파트에 있다가 집에 와서 문을 탁 열어놓으면 아이고, 여가 천당이다 싶어.”

송순방 씨를 비롯하여 철도관사마을 어르신들에게서 일반인들에게 불하되기 전의 일제시대 관사마을 모습을 고스란히 담고 있는 사진자료 등을 찾아보기는 쉽지 않았다. 복개되기 전 마을의 중심도로 옆에 개울이 흐르고 벚꽃이 흐드러진 철도관사마을의 모습을 이야기로만 들을 수밖에 없었다. 다들 어려울 때여서 사진으로 마을 모습을 남겨둘 여유가 없었을 터이다.

“관사마을이 많이 변했죠. 철도직원들만 살다가 불하를 해부니까, 일반인들이 들어와서 집 좋게 지어 살기도 하고. 옛날 지붕은 없고 다 지붕개량 해불고, 집안도 많이 개조해서 살제. 우리집도 개조를 많이 하긴 했는디, 방안에 나무랑 창문이랑 문짝이랑은 모두 일제시대 당시 그대로야.” (사진 참조)


71세부터 80살까지 하루도 안 빠지고 운동을 다녔어

송순방 씨의 하루는 새벽 4시 30분에 시작한다. 10년이 넘게 중앙경로당에서 새벽 5시 요가를 하기 때문이다. 열댓 분의 어르신이 새벽 다섯 시면 경로당으로 요가를 하러 모여든다. 한 시간 정도 요가가 끝나면 아침식사를 하러 댁으로 돌아가신다. 유난히 건강한 비결과 밝은 에너지는 여기에서 나온 듯하다.

“나가 손자들 키워 환갑 때 보내놓고, 운동을 조금씩 시작했어. 그러다가 2000년에 영감 돌아가셔서 아무것도 안하고 있다가, 2001년부터(70세) 여성회관 다녔어요. 노래교실, 단전호흡, 요가, 에어로빅 배우러 5년 동안을 여성회관까지 걸어다녔어요.(30~40분 소요) 용당동 복지회관은 2005년 10월 개관했는데 그때부터 6년을 다녔어요. 긍께 나가 80살까지 하루도 안 빠지고 일주일을 돌아다닌 사람이여.”

하지만 세월의 무게는 못 이기나보다. 몇 년 전부터는 무릎이 아파 지금은 수영장 물속에서 걷는 운동만 하신다고 한다.

조곡동 중앙경로당 살림을 도맡아서 챙기는 오태례 부녀회장(67세)은 송순방 씨를 이렇게 이야기한다.

“새벽 요가도 하루도 빠짐없이 나오고, 경로당에서 나이가 젤 많은 축에 드는디 우리들 이야기 다 받아주고 들어주고 그래. 우리 경로당 분위기가 좋아서 관사마을 옆 동네에서도 이리로 와요. 다 회장님이 분위기를 그렇게 만드니까.”

남편 최영식 씨가 돌아가시고 난 후, 명절을 쇠러 자식들 집으로 가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60년을 철도관사마을에서 밝고 건강한 웃음으로 지내고 계시는 송순방 씨. 몇 시간 함께 있다 보니 여든 셋이라는 나이가 믿기지 않을 정도로 건강하고 씩씩한 에너지가 솟아나는 것을 느낀다. 그 에너지가 철도관사마을의 역사를 건강하게 이어주고 있는 것만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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