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성호의 ‘식민지 유산 ’의 한국현대사<4>

▲ 강성호
순천YMCA 간사
1948년 5월 31일 제헌국회가 개원되었다. 이들에게는 헌법을 제정하고 대한민국정부를 수립하는 임무가 주어졌다. 헌법을 만드는 과정에서 정부형태를 둘러싼 치열한 논쟁이 벌어졌다. 대통령중심제와 의원내각제 가운데 무엇을 선택할 것인가에 대한 문제였다. 결국, 대통령중심제를 원하는 이승만의 구상이 채택되었다.

제헌헌법에는 이승만이 강력하게 원하던 대통령중심제가 반영되었지만, 다른 부분에서 현재의 우리가 눈여겨봐야 할 부분이 많다. 무엇보다 제헌헌법은 1919년의 대한민국임시정부를 계승한다는 점을 명백히 밝혔다. 심지어 이승만도 “이 민국은 기미(1919년) 3월 1일에 (중략) 임시정부를 건설하여 민주주의의 기초를 세운 것”이라고 이야기하였다. 건국의 시점을 ‘1948년’으로 잡는 뉴라이트의 현대사 인식은 이승만의 역사 인식과도 맞지 않다는 걸 알 수 있다.

그밖에 제헌헌법은 조소앙의 삼균주의를 한 단계 발전시킨 ‘만민균등주의’를 기본정신으로 삼았으며, 제1조(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와 제2조(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를 통해 공화주의 사상을 표방했다. 제5조를 통해서는 국가의 공공성을 강조하였으며, 제6장에서는 사회민주주의적 요소를 확인할 수 있다. 이러한 요소들은 현재의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많다고 생각한다.

주목해야 할 점은 사후에 형사책임을 묻는 소급입법이 제헌헌법에 명시되었다는 사실이다. 이는 친일파 처벌을 위한 조항을 넣자는 소장파 김광준 의원의 발언에서 비롯되었다. 당시의 시대적 상황에서 반대할 수 없는 주장이었다. 논란 끝에 “이 헌법을 제정한 국회는 단기 4278년(1945) 8월 15일 이전의 악질적인 반민족행위를 처벌하는 특별법을 제정할 수 있다”는 내용이 제101조에 명시되었다. 재석의원 154명 가운데 찬성 85, 반대 34로 가결된 것이다. 1948년 6월 말에 이루어진 일이다.

제헌헌법에 명시된 친일파 처단 조항은 <반민족행위처벌법>(이하 반민법)의 제정으로 이어졌다. 8월 5일 김웅진 의원은 해방 후에도 악질적인 반민족행위자들이 조금의 반성도 없이 계속 활동하고 있다고 지적하면서 이들을 처벌하기 위한 특별법을 마련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여기에 대한 반대의 논리가 없지는 않았다. 무엇보다 특별법이 시행되면 사회가 혼란에 빠질 것이라는 시기상조론이 제기되었다. 그러나 결국 재석의원 155명 가운데 찬성 105, 반대 16이라는 압도적인 표차로 반민법의 마련이 가능해졌다.

반민법은 정부가 수립된 지 약 40일이 지난 시기에 제정되었다(9.22). 이 법의 실행기관으로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이하 반민특위)가 조직되었다. 명칭 그대로 반민족행위자의 행적을 조사하는 목적을 가졌다. 그리고 이들을 처벌하기 위한 특별검찰부와 특별재판부를 둠으로써 기소권과 재판권을 행사할 수 있게 되었다. 또한, 반민특위는 특별경찰대를 설치하여 반민족행위 혐의자들을 직접 체포하고 조사할 수 있는 수사권도 가지게 되었다. 반민법의 제정과 반민특위의 조직은 친일파 처단의 제도화가 이루어졌음을 의미한다.

반민특위는 1949년 1월 8일 미국으로의 도피를 시도하고 있던 박흥식을 검거하면서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하였다. 반민특위는 서울에 거주하고 있던 친일파를 체포한 후 1월말부터 각 지역에 거주하고 있던 거물급 친일파의 체포에 나섰다. 국회에 제출한 보고서에 의하면, 반민특위는 활동기간 동안 688명의 친일파를 취급했다고 한다. 여기에는 일제의 지배 체제를 강화하고 식민정책을 집행하는 데 핵심적인 역할을 한 인사들과 일제의 식민정책을 홍보, 선전하는 데 큰 역할을 담당한 인사들이 체포되어 재판을 받게 되었다.

하지만, 이승만 정권은 여러 가지 수단을 동원하여 반민특위의 활동을 방해하였다. 예산 및 사무실을 미배정하거나 반민특위의 자료요청을 거부함으로써 반민특위가 일을 하지 못하도록 했다. 또한 외부적으로 반민법을 규탄하는 반공대회를 묵인하는 한편, 내부적으로 반민법 개정안을 통해 반민특위의 권한을 축소시키려 했다. 이를 위해 1949년 2월 2일 이승만 대통령은 ‘삼권분립의 원칙’을 비판의 논리로 사용하기 시작했다. 즉, 반민특위가 조사권뿐만 아니라 기소권과 재판권까지 행하는 것은 삼권 분립의 원칙에 위배된다는 주장이다.

한편, 4월 13일 반민특위 부위원장 김상돈이 교통사고의 가해자로 검찰청으로부터 기소되자 이승만 대통령은 이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4월 15일 반민특위의 조사위원들이 권한을 남용하고 위법적 행동을 하고 있음을 비판하였다. 그리고는 반민특위의 권한 남용을 설명하기 위해 양주삼 목사의 검거가 국제적 문제를 일으키고 있다고 발표했다. 즉, 그는 “워싱턴에서 온 보고를 듣건대 (중략) 양주삼 목사를 반민법에 걸어 수감했다”.

 “여러 친구들이 이 사건에 대단히 격분해서 국제문제를 삼기에 이르렀으니”, “국제문제를 일으키게 된 것은 많은 유감”이라고 설명하였다. 양주삼 목사는 1930년대 감리교회를 대표한 교회지도자로 전시체제기에 징병제를 찬양하는 등 적극적인 전쟁협력을 수행한 친일목사였다.

주목할 점은 이승만 대통령이 양주삼 목사의 검거를 핑계로 반민특위의 권한 제한을 주장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는 “지금부터는 소위 특별조사위원은 조사만하고 사법에 넘겨서 행정이나 사법일은 조금도 참여하지 못할 것”, “특경대는 해산시켜서 그러한 명의로 불법행위를 하는 자는 엄벌 중치할 것” 등 삼권분립의 논리를 바탕으로 반민특위의 권한을 제한할 것을 강조하였다. 이는 4ㆍ16진상규명위원회를 삼권분립의 논리로 비판한 박근혜 정권과 오버랩되는 부분이다.

이런 상황에서 이승만 정권은 반민특위 습격사건(1949.6.6), 국회프락치사건(1949.6.20), 김구암살사건(1949.6.26) 등 소위 6월 공세를 통해 극우반공체제의 골격을 마련하게 되었다. 이를 계기로 반민특위는 와해되었으며 친일파 청산의 노력은 좌절되고 말았다.

 


해방 70주년이 되었지만 친일 논쟁은 여전하다. 이는 식민지 유산을 완전히 청산하지 못한 까닭이다. 그렇다면 식민지 유산이 무엇이기에 70년이 지난 지금도 영향을 미치는 것일까.

먼저, 식민지 유산의 청산에 대한 논의는 지금까지‘친일파 처단’이라는 인적 청산으로 초점이 모아졌다. 그러나 식민지 유산은 이보다 더욱 구조적이고 체제적인 차원에서 고민해 볼 필요가 있다. 식민지배의 경험을 통해 우리는 국가주의적 사고방식과 행동방식을 체득했고, 이것이 남북한 체제의 정체성을 구성하는 데 중요한 요인으로 작용했다.

식민지 유산은 한국현대사를 결정짓는 구조적 요인이다. 해방 이후의 역사는 식민지 시기의 역사와 연속성을 가지고 있다. 해방 이후의 역사는 식민지 유산을 토대로 작동하고 있다.

성균관대학교에서 사학을 전공한 강성호 씨의 글을 통해 식민지 유산이 구체적으로 우리나라 현대사에 어떤 영향을 미치고 있는지 살펴보는 기회를 갖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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