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성호의‘식민지 유산’의 한국현대사 <3>

▲ 강성호
순천YMCA 간사
현재 우리는 국가보안법 체제에서 살아가고 있다. 국가보안법 체제는 사상의 자유와 평화통일을 위한 노력을 합법적으로 억압할 수 있는 구조로 분단체제의 유지와 재생산에 막대한 영향력을 미치고 있다. 특히, 국가보안법 체제는 지난 70년의 한국현대사에서 무수히 많은 ‘벌거벗은 생명’을 양산하는 폐해를 낳았다. 국가보안법 체제는 반국가단체와 이적단체를 검거한다는 명분을 이용하여 ‘함량 미달의 간첩’을 대량으로 만들었기 때문이다.

특히, 1970-80년대에는 재일교포와 납북어부들이 국가보안법 체제의 희생물이 되었다. 이러한 과정에서 함량 미달의 간첩들은 고문을 겪으며 인권이 심각하게 훼손되었다. 고문이 가해진 이유는 크게 두 가지였다. 먼저는 유일한 증거자료인 자백을 받기 위해서이고, 다른 하나는 간첩에게 무슨 인권이 있느냐는 발상 때문이었다. 한국전쟁 전후 시기에 이루어진 민간인 학살과 더불어 국가보안법 체제가 극우반공체제의 공고화에 아주 큰 기여를 했다는 점에서, 한국현대사를 ‘국가보안법 체제의 역사’라고 일컬어도 영 무리는 아닐 것이다.

국가보안법 체제의 근간은 국가보안법이었다. 국가보안법의 제정은 크게 두 국면으로 나눌 수 있다. 첫째 국면은 1948년 9월 20일 ‘내란행위특별조치법’이라는 법안이 발의되었을 때이다. 내란행위특별조치법은 국가보안법의 전신으로 내란행위 자체의 처단과 함께 내란을 예방하기 위한 목적을 가졌다. 그러나 당시의 사회적 분위기로 인해 이 법안의 상정은 불발되었다.

둘째 국면은 여순사건의 발발 이후부터 국가보안법이 제정ㆍ공포될 때까지이다. 1948년 10월 19일에 발생한 여순사건은 국가보안법의 제정에 결정적인 계기를 마련해주었다. 제주4ㆍ3사건의 진압을 거부한 여수14연대의 항명은 신생정부의 입장에서 체제 안정화에 큰 부담이 되었다. 따라서 이승만 정권은 11월 9일 국가보안법 초안을 제출하여 국가보안법의 제정을 위한 프로젝트에 착수하였다. 신생정부의 기틀을 다지고 좌익세력을 제거하기 위해서다. 결국, 국가보안법은 12월 1일 제정ㆍ공포되었다. 정부가 수립된 지 4개월이 채 되지 않은 상황에서 형법의 제정보다 5년 빨리 만들어진 것이다. 문제는 국가보안법이 중대한 법률적 사안인데도 불구하고 한 달도 채 되지 않는 단기간에 제안에서부터 심의ㆍ통과까지 이루어졌다는 사실이다. 졸속으로 입법된 것이다.

국가보안법의 제정 과정에서 반대론을 주장한 국회의원들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이들은 국가보안법이 독립운동가나 정부 비판자들을 때려잡는 데 악용될 수 있다는 비판을 제기하였다. 국가보안법의 폐지를 몇 번이나 국회에 상정했지만 번번이 부결되었을 뿐이다(이들은 약 반년 후 국회프락치 사건관련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구속된다).

흥미로운 사실은 “반민족행위처벌법 제5조가 완전 실시된 날”에 국가보안법을 시행하자는 일부 의원들의 주장이다(서울신문, 1948.11.20). 국가보안법의 제정 논의에서 친일파 처단을 위해 마련된 반민족행위처벌법이 갑자기 거론된 것이다. 국가보안법의 제정을 반대하는 국회의원들은 주로 법조항의 자의적인 해석과 집행을 염려하였다. 특히, 이들은 친일파 출신의 관리들이 국가보안법을 악용하여 독립운동가 출신자들을 탄압할 가능성을 걱정하였다. 국가보안법 문제를 친일파 문제와 연결시킨 것이다.

이러한 점은 국가보안법 제정의 첫 번째 국면에서도 엿볼 수 있다. 1948년 9월 7일 반민족행위를 처벌하는 특별법을 만들 수 있다는 제헌헌법의 조항(제101조)에 따라 국회는 반민족행위처벌법을 제정하였다. 여러 가지 논란 끝에 반민족행위처벌법은 9월 22일 법령 제3호로 공포되었다. 친일파 처단을 위한 법적 장치가 마련된 것이다. 문제는 이와 비슷한 시기인 9월 20일에 국가보안법의 전신인 내란행위특별조치법이 제안되었다는 사실이다. 즉, 국가보안법 제정의 최초 시도는 친일파 처단 문제가 본격화될 때와 겹친다. 이것은 무엇을 말하는 걸까. 최신 연구에 의하면, 이러한 정황은 국가보안법의 제정에 친일세력의 정치적 의도가 개입되었을 가능성을 전혀 배제할 수 없다고 한다.(변동명, 2007)

친일인사들이 리더를 구성한 한민당(야당)이 자신들을 겨누는 칼날로 돌변할 소지가 다분했음에도 불구하고 국가보안법 제정에 앞장선 이유이기도 하다. 즉, 국가보안법은 친일파 처단이 가능해진 불리해진 상황을 타개하기 위한 ‘친일파 생존논리의 법제화’이기도 하다.

정부가 수립되고 한 달이 지난 시기에 친일파 처단을 위한 법안과 국가보안법이 나란히 등장하였다. 하지만 전자는 이승만 정권의 6월 공세로 백지화가 되었고, 후자는 오히려 몇 차례의 개정 과정을 통해 현재까지 막강한 영향력을 미치고 있다. 식민지 유산은 반공이라는 기치 아래 살아남아 우리의 일상과 함께 하고 있다. 

 


해방 70주년이 되었지만 친일 논쟁은 여전하다. 이는 식민지 유산을 완전히 청산하지 못한 까닭이다. 그렇다면 식민지 유산이 무엇이기에 70년이 지난 지금도 영향을 미치는 것일까.

먼저, 식민지 유산의 청산에 대한 논의는 지금까지‘친일파 처단’이라는 인적 청산으로 초점이 모아졌다. 그러나 식민지 유산은 이보다 더욱 구조적이고 체제적인 차원에서 고민해 볼 필요가 있다. 식민지배의 경험을 통해 우리는 국가주의적 사고방식과 행동방식을 체득했고, 이것이 남북한 체제의 정체성을 구성하는 데 중요한 요인으로 작용했다.

식민지 유산은 한국현대사를 결정짓는 구조적 요인이다. 해방 이후의 역사는 식민지 시기의 역사와 연속성을 가지고 있다. 해방 이후의 역사는 식민지 유산을 토대로 작동하고 있다.

성균관대학교에서 사학을 전공한 강성호 씨의 글을 통해 식민지 유산이 구체적으로 우리나라 현대사에 어떤 영향을 미치고 있는지 살펴보는 기회를 갖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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