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성호의‘식민지 유산’의 한국현대사 <2>

▲ 강성호
순천YMCA 간사
해방 이후 일제잔재의 청산은 새로운 주권정부를 수립하는데 반드시 필요한 과제였다. 이때 일제잔재의 청산은 주로 친일파라는 인적 청산으로 초점이 모아졌다. 민중은 ‘인민재판’, ‘민중재판’이라는 이름으로 친일파를 척결하면서 해방을 실감할 수 있었다.

한 조사에 의하면 해방이 되었던 1945년 8월 16일부터 23일까지 8일 동안 민중에 의한 자연발생적인 친일파 처단은 913회에 달했다고 한다. 이 가운데 가장 많은 비중을 차지했던 것은 경찰관서 습격과 신사 방화였다. 일제의 식민지배를 떠받치던 물리적 수단과 정신적 수단에 대한 민중의 분노와 보복이 어느 정도였는지를 알 수 있다.

한편, 남한에서는 정부수립 문제를 두고 우익세력의 임시정부 추대운동과 좌익세력의 인민공화국 옹립운동이 충돌하고 있었다. 중도세력은 통일전선운동을 펼쳐 좌우대립의 간격을 가능한 줄이려고 했으나 여의치 않았다. 이런 상황에서 1945년 12월 16일 모스크바에서 미국, 영국, 소련의 세 나라 외상회의가 열렸다. 이때 한반도 처리의 문제를 둘러싸고 미국과 소련이 충돌했다. 미국은 신탁통치 중심의 국제적인 해결방식을 주장하였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소련의 제안(선 정부수립, 후 신탁통치)이 채택되었다. 쉽게 말하자면, 미국과 소련의 공동위원회가 한국의 정당ㆍ사회단체와 협의하여 새로운 임시정부를 수립하는 내용이었다. 신탁통치에 대한 내용도 있으나 미국의 구상과 달리 그 비중은 약화되었다. 소련은 해방 이후의 한반도 상황이 자신에게 유리하다고 판단하여 친소련적인 임시정부를 수립할 자신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한국현대사의 향방을 결정짓는 어마어마한 오보사건이 터졌다. 1945년 12월 27일자 동아일보는 모스크바 3상회의의 결과를 “소련은 신탁통치 주장”, “미국은 즉시 독립 주장”이라고 보도한 것이다. 동아일보는 미국과 소련의 주장을 정반대로 보도하여 즉각적 독립을 요구하는 민족감정을 자극시켰다. 곧바로 신탁통치를 반대하는 반탁운동이 우익세력을 중심으로 일어났다. 특히, 김구를 중심으로 한 중경 임정은 자신들이 주도권을 잡기 위해 반탁운동을 주도하였다. 당시 남한지역을 점령하고 있던 미군정은 이를 알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동아일보의 왜곡보도를 해명하지 않았다. 오히려 미군정은 우익세력의 정치적 입김을 강화시키기 위해 이를 방조했다. 심지어 최신 연구에 의하면, 이 오보 기사의 출처는 도쿄의 미육군 극동군사령부와 서울의 주한미군사령부가 조직적으로 관련되어 있었다고 한다(정용욱, 167쪽).  

▲ 모스크바 3상회의의 결과를 왜곡 보도한 1945년 12월 27일자 동아일보

신탁통치 파동은 1946년 1월 22일자 타스(Tass) 통신이 모스크바 3상회의의 협상내용을 공개하면서 일시적으로 수그러들었으나 당시의 정치지형을 근본적으로 바꾸어 버렸다. 중요한 것은 반탁운동을 계기로 ‘민족 대 반민족’이라는 대립구도가 ‘좌익 대 우익’의 구도로 전환되었다는 사실이다. 즉, 남한의 정치지형이 ‘민주의원’으로 대표되는 우익연합체와 ‘민족전선’이라는 좌익연합체로 헤쳐 모이게 되었다. 좌우의 대립과 갈등이 본격화되기 시작한 것이다.

이로 인해 친일파는 신분 세탁을 할 수 있었다. 반탁운동이 있기 전 ‘민족반역자’란 말은 ‘친일파’를 의미했다. 그러나 모스크바 3상회의의 내용이 잘못 알려지면서 반탁 입장을 고수하지 않는 자는 모두 민족반역자가 되어야 했다. 당시 “신탁통치 배격운동에 협력치 않은 자는 민족반역자로 규정”한다는 구호가 이를 잘 보여준다. 그러다보니, 친일파들은 반탁운동을 계기로 자신들의 과거가 면제되고 오히려 애국자로 행세할 수 있게 되었다. 실제로 조선총독부에 근무한 관리, 경찰 출신의 인사들은 반탁운동에 대거 참여하였다. 반공주의의 일환으로 전개된 반탁운동은 소련을 ‘악마화’ 함으로써 과거사 문제를 은폐하는 효과를 발휘하였다.

또, 신탁통치 파동은 분단체제 성립과 밀접한 관계를 가진다. 반탁운동은 모스크바 3상회의의 결정에 따라 진행한 미국과 소련의 공동위원회가 완전히 결렬되는 데 가장 큰 공헌을 했다. 미소공동위원회의 결렬은 미국이 한반도 문제를 UN에 이관하는 결과를 가져왔고, 이것은 곧 남한에서의 단독선거로 이어졌다. 1948년 5월 10일에 치러진 단독선거를 통해 남한에서는 ‘대한민국’이라는 분단정권이 수립되었다. 이를 통해 자유민주주의의 제도화는 이루어졌으나 자유민주주의를 실천할 정치세력이 부재한 모순이 발생하였다. 다만, 국가보안법의 제정을 통해 극우반공체제가 남한의 정치와 사회를 압도하기 시작하였다. 
 


해방 70주년이 되었지만 친일 논쟁은 여전하다. 이는 식민지 유산을 완전히 청산하지 못한 까닭이다. 그렇다면 식민지 유산이 무엇이기에 70년이 지난 지금도 영향을 미치는 것일까.

먼저, 식민지 유산의 청산에 대한 논의는 지금까지‘친일파 처단’이라는 인적 청산으로 초점이 모아졌다. 그러나 식민지 유산은 이보다 더욱 구조적이고 체제적인 차원에서 고민해 볼 필요가 있다. 식민지배의 경험을 통해 우리는 국가주의적 사고방식과 행동방식을 체득했고, 이것이 남북한 체제의 정체성을 구성하는 데 중요한 요인으로 작용했다.

식민지 유산은 한국현대사를 결정짓는 구조적 요인이다. 해방 이후의 역사는 식민지 시기의 역사와 연속성을 가지고 있다. 해방 이후의 역사는 식민지 유산을 토대로 작동하고 있다.

성균관대학교에서 사학을 전공한 강성호 씨의 글을 통해 식민지 유산이 구체적으로 우리나라 현대사에 어떤 영향을 미치고 있는지 살펴보는 기회를 갖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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