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도관사마을에서 만난 사람들 2 - 성락희(84세)

철도퇴직자들의 모임인 순천철우회 사무실은 철도관사마을의 입구라고 할 수 있는 철도운동장 건너편 철도노조 사무실 옆 건물에 자리하고 있다. 1층 사무실은 항상 어른신들 예닐곱분이 신문도 보고 담소도 나누며 계시고, 2층 관사경로당은 십여분이 바둑, 장기를 두며 하루하루를 보내신다.

▲ 44년부터 69년을 철도관사마을에서 살고 계신 성락희(84세)씨
인터뷰하러 왔다는 이야기에 “우리같은 사람들헌티 머시 들을것이 있다고, 진짜 어렵게 쭉 생활했던 분들은 한 10년전에 다 돌아가셨어. 그 분들이 살아계셨으면 좋았을텐데...”라며 말문을 여신다.

성락희(84세) 어르신이다. 전북 남원이 고향이고 1944년 11월 11일 열다섯의 나이로 순천철도에 입사한다. 해방전후의 순천철도와 조곡동 철도관사마을을 이야기하는 몇 안되는 분이다.
 

아, 그때는 사람다운 대접을 못받았제

“그때는 철도를 움직이고 했던 사람들이 다 일본 사람들이잖아요. 아, 그 애로사항은 다 말할 수 없어. 사람다운 대접을 못 받았다고 해야 돼. 그저 한 마디 해갖고 안 들으면 두 번째는 요거여.(주먹과 발로 때리는 시늉을 하며) 몸도 약한데다가 아직 어렸을 때 아니여. 열다섯 살인께.

우리가 같은 민족끼리한테 그렇게 꾸지람 듣고, 뺨 한 대씩 맞고 한 건 괜찮은데, 그 놈들은 민족적으로다가 멸시도 하고 그냥 뭐 두 마디도 안해. 한 마디 해갖고 안 통하면 일 잘 못하네 하면서 막 차고 때리고 그랬제.“


그때 증기기관차 승무원들은 중노동이여, 중노동


해방이 되고 일본이 물러간 철도현장은 기술, 자료 등이 부족했던터라 기차를 운행하는데 많은 어려움이 있었다고 한다.

“자료 같은 것도 얼마 없고 보수하는데 기술이 부족하지. 그러다 보니까 기차가 가다 쉬고 많이 했어. 터널에 갈 때는 그대로 순조롭게 가도 연기를 들어 마시는데, 물이 떨어지는 굴에 들어가면 바퀴가 공전해분다 말이여.(바퀴가 굴러가지 않고 그 자리에서 회전한다는 것) 공전해불면 증기가 팡팡 튀고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되것어. 막 등짝이 뜨겁고, 수건으로 막고. 그래도 불은 떼야 하고. 그래도 안되면 굴 속에다 차 세워 놓고, 둘이 가서 철길에 모래 깔아 놓고 올라와야 돼. 아이고 말도 못해.”

1949년 충북 죽령터널(길이 4.5km로 우리나라에서 가장 긴 터널)에서는 열차가 정차해 48명의 승객이 질식사하기도 했다고 하니, 당시의 어려움을 짐작할만도 했다.


6.25때 우리 동료도 많이 죽었지

6.25 당시 철도직원들 중에서도 열차운전(기관사, 기관조사)하는 직원들은 특수한 기술을 가졌다고 해서 군사요원으로 분류되어 징병되지 않았다.

“6.25 때는 기관조사였지. 지금은 다이아(근무표)가 있지만 그때는 열차가 막 들쑥날쑥하니까 운전을 심하게 시켰어. 쟈들(인민군) 세계가 됐을 때는 낮에는 차 움직일 수가 없어. 막 폭격 때려불고 하니까 밤에 가. 밤에 가면 불 땔 때 불빛 안새게 싹 가마때기 덮어. 그래갖고 가는 거여. 북한군이 시키면 그대로 해야지. 어떡혀. 살라믄 해야지 뭐.”

성락희씨는 운이 좋아 용케 살아남았지만 전쟁통에 운전하다 죽은 동료들도 많이 있었다며 당시를 회상한다.

“6.25 때 쟤들이(인민군) 물러가고 인천상륙 작전으로 유엔군 와가지고 그때는 필요한 물건 수송하러 낮에도 댕겼거든. 그러면 도망 못간 빨치산들이 막 습격해분 거여. 불안해도 어쩔거여. 자기 탈 자리가 되면 가야지.”

“나하고 동기생이여. 하필 그날 광주로 근무 나갔단 말이여. 근디 빨치산들이 와갖고 동네사람 잡아다가 야간에 철길을 파버렸어. 기관사가 보면 이상이 없지. 가다가 둬 바퀴 궁구러갖고 냇가 상에 쳐박혀서 기관차가 하늘을 보고 있어. 거기서 증기파이프가 터졌어. 파싹 익어갖고 내 동기 하나가 거기서  그냥 죽었어.”

▲ 성락희씨와 부인 강난순씨(79세). 부인은 강수련(93세. 철도관사마을 사람들이야기 (1)의 주인공)씨의 여동생으로 일본에서 태어나 해방 후 귀국하였다.

해방되고 나서부터 관사에서 쭉 살았제

해방이 되고 나서 일본인 철도직원들만 살았던 철도관사는 한국인 철도직원들이 살게 되었고 성락희씨는 독신자들이 사는 승무원숙소에서 생활하게 된다.

“혼자 있다가 박정희 대통령이 돼갖고 그 때 적산지다 해가지고 전부 불하를 해부렀거든. 나도 승무원숙소에 늦게까지 남아갖고 불하받고 살다가 장가가서, 방 하나에 둘이 살다가 살림 좀 늘리고 부엌하나 만들어갖고 살고 그랬지. 그러다가 애들도 크고 그래서 승무원 숙소 팔아불고 관사로 이사 온 거여. 사갖고”

 
▲ 철도관사마을의 전경(위)과 관사 하나가 두세대로 연결돼 있는 철도관사 모습(아래).
지금 대부분의 철도관사는 개조를 해서 옛 형태를 찾아볼 수 있는 집은 많지 않다. 지금은 복개되었지만 철도운동장에서 관사마을 위쪽으로 향하는 큰길은 당시에는 작은 개울이 흐르고 있었고 길 양옆으로 벚꽃나무가 피어있어 무척이나 아름다운 마을이었다고 회상한다.

“여기 철도관사는 집모양이랑 내부 구조가 똑같아. 약간 크고 작고 차이만 있지. 불하해서 전부 개인들이 와서 개조하고 뜯어 불고 새로 짓고 한 거여. 81호까지(?) 있어. 관사 하나가 두 세대, 두 집이거든. 긍께 일본놈들이 여기서 160세대는 최소한으로 살았다는거여. 한 가족에 두명, 애 하나씩만 잡으면 320명 여기에 400명 정도 살았던 거여. 애들까지 하면. 일제 때.”

당시 철도병원, 목욕탕, 구락부(영화, 연극, 공연 등을 했던 당시 클럽) 등의 건물까지 있었다고 하니 일제시대 철도직원들을 위해 계획적으로 조성한 큰 규모의 마을이라고 볼 수 있다.


우리 집사람 귀환동포라, 하~ 고생 많이 했어

“우리 집사람은 시집와서 일편단심 나만 보고 살아. 그때 생활이 어려울때니까 행상도 많이 하고 고생이 많았제. 장인장모가 일본에 가서 거기서 낳고 살다가 해방되고 나왔어. 나 스물두살이고 집사람 열일곱살 때 결혼했지. 집사람이 강수련씨 여동생이야. 한국풍속에 서툴러. 한국말도 어려운 말은 지금도 못해. 혀가 잘 안돌아가. 못고치드만 못고쳐.”


그래도 내가 저 양반들한테 좋은 일 했구나


열다섯살 눈에 비친 기관사 제복과 모자는 성락희씨의 선망의 대상이 되었고 ‘나도 기관사 한번 해봐야겠다.’라는 목표를 정했다. 그런 성락희씨가 44년동안 철도근무하면서 느낀 보람은 무엇이었을까?

“여수 같은 종착역에 손님이 내리면 ‘하~ 내가 그래도 저 양반들한테 좋은 일 했구나’ 그랬고. 입영열차 해당되면 ‘아이고! 내새끼’ 막 홀딱홀딱 뛰고 울고불고 그러면 나도 눈물나고, 또 애인하고 둘이 붙잡고 울고짜고 하~, 그럴 때 보람을 느꼈고. 야! 그래도 내가 어려서 봤던 기관사 ‘나도 해냈구나’ 하는 그런 자부심을 가졌지.”

44년에 입사했다가 88년 12월에 퇴직한 성락희씨는 기관사 근무 형태상 명절도 생일도 가족행사도 제대로 챙기지 못하고 일했다고 한다. 그런 그가 열차타면서 조금 서운한게 있다고 했다.

“당신 같은 사람들 솔직허니, 종착역에 내려서 정거장에 개찰구로 나가지. 근데 기관사들한테 ‘수고했소’ 해봤어? 그런 일 없지? 응? 없잖아. 긍께 고독해 그렇게.”

성락희(84세)씨는 전북 남원이 고향이지만 69년을 조곡동 철도관사마을에서 살았으니 이곳이 자신의 고향이란다.

그의 모습에서 114년 세월동안 서민들의 애환과 근현대사의 아픔을 함께 했던 한국철도의 가쁜 호흡을 느낀다.

그는 “우리같은 늙은이가 할 수 있는 일자리가 있었으면 좋겠어.” 라며 철우회 사무실에서 시간을 보내는 일 말고 자신이 필요한 공간에서 일하고 싶다는 바람을 이야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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