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박병섭
순천공고 역사교사
신도시 개발에 밀려 쇠락해 가던 원도심을 살리기 위한 노력이 진행되고 있다. 옛 승주군청과 주변 건물을 사들여 옛 남문 누각이었던 연자루를 복원하고, 순천부읍성을 현대적으로 복원해 상징공간으로 만든다고 한다. 순천 도심권의 문화 유적이 이렇게라도 다시 복원된다니 다행스럽다.

그런데 순천의 역사 복원을 보면 조선의 관아 복원과 근대의 생활사 재현이 주를 이루는 듯하다. 다른 지역도 이런 경향이 있는데 꼭 이럴 필요가 있을까?

우리 역사에는 다양한 왕조가 있었다. 조선 왕조가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와 가깝기 때문에 기억을 되살리는데 유리한 측면이 있을 터이지만, 그 지역의 역사 자원과 연결하여 설정하면 좋지 않을까. 사료관을 짓는다고 하는데, 사료관은 기본적으로 사료 보관의 장소이므로 비싼 땅 위에 짓는 것보다 넓은 곳에 넉넉하게 짓고, 이곳에는 역사관을 지어 지역의 역사를 살필 수 있게 해야 한다.

남문다리 부근에 연자루를 복원하는 것은 괜찮을 성 싶다. 옥천과 연결하면 풍광도 살아나고 역사성도 있을 것이다. 옛 것을 그대로 만드는 것보다는 새 시대에 맞는 건축물이면 더 좋지 않을까. 과거의 연자루는 기본적으로 양반 관료의 놀이판이었다. 양반 관료들이 물러간 일제 강점기에는 청년 회원들의 우국,구국 운동의 요람이었다. 일제 때 연자루를 헐게 한 것도 그 때문이었을지 모른다. 양반의 풍류 문화를 복원하는 것도 의미는 있을지 모르지만, 시민이 함께하는 공간으로 설정하는 것이 좋지 않을까?

‘순천’이라는 이름에 집착할 필요는 없다. 1310년에 순천이 된 것은 승주목에서 고을의 급이 낮춰진 결과였다. 순천은 구석기 유적이 발견된 오랜 도시인데, 고작 700년의 도시로 내세우는 것은 우리 스스로 지역의 역사성을 축소시키는 것이다. 원도심에는 박난봉 장군 묘와 같은 고려 시대와 연관된 자취도 있고, 후삼국 시대의 순천 호족이었던 박영규와 연관한 볼거리를 만드는 것도 생각해 볼 일이다.

순천에서는 문인들이 많이 나왔다. 전근대 시기에 임청대를 무대로 승평4인 배숙(1516~1589), 정소(1518~1572), 허엄(1538~1610), 정사익(1542~1588)이 활동했는데, 임청공원에는 이들의 존재를 알려주는 상징물 하나 없다. 순천만에 정채봉과 김승옥 문학관은 있지만, 순천의 문학 흐름을 알게 해 주는 공간은 하나도 없으니 안타까울 일이다. 좋은 자리 잡아 제대로 된 순천문학관 하나 들어섰으면 좋겠다.

무엇보다 순천은 새로운 세상을 만들고자 한 중심 고을이었다. 조선 말기 임술 농민 봉기 때 동헌을 점령했으며, 동학농민운동 당시에는 영호 도회소가 순천부 동헌에 설치되었는데, 이에 대한 얘기는 별로 없다.

특히 순천은 1920년대 소작쟁의가 치열했다. ‘절초 동맹’까지 조직하여 지주에 맞섰다. 1920년대 최대 농민운동으로 교과서에 나오는 암태도 소작쟁의는 순천의 소작쟁의에서 크게 영향을 받았다는 학계의 연구도 있다. 소작쟁의가 치열하게 전개된 지역에는 크고 작은 조형물이 세워졌지만, 순천에는 소작쟁의 현장에 사건을 기념하거나, 주도 인물을 기리는 표석하나 없다. 주도 인물의 한 사람인 이영민에 대해서는 ‘순천가’ 공원에 조금 나올 뿐이다.

순천은 일제강점기에 전남 동부 6군의 사회운동 중심지였다. 신문 기자들은 지역의 진보적 지식으로 사회운동을 이끌었다. 이들이 활동의 근거지로 삼았던 곳이 순천지방청년회관, 순천청년회관, 순천농민연합회관, 순천 신간지회 회관이었다고 네이버 뉴스라이브러리에서도 검색이 된다. 원도심 어디였을 것 같은데 이와 관련한 내용이 원도심 소개 책자 어디에도 보이질 않는다. 이 지역 청년들의 항일 운동 거점 한 곳이라도 찾았으면 좋겠다.

순천의 원도심은 동헌과 순천군청(승주군청)으로 대표되는 행정 관청이 있었고, 호남사거리, 중앙시장으로 대표되는 저잣거리만 있었던 곳이 아니라, 오늘의 순천을 만들고자 했던 옛 순천인의 고뇌와 땀이 배어 있는 곳임을 유의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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