꼬박 이틀을 아파 누웠다. 몸에 열이 가득 오르고 뼈마디가 아프다. 몸살이다. 옆에서는 약을 먹으라고 한다. 나는 먹지 않고 버텼다. 열은 몸 안에서 싸우느라 나는 것이니까. “병원에 가서 주사 한방 맞으면 금방 낫는데, 왜 이렇게 고생하는지 모르겠네.” 옆에서 지켜보는 사람들이 약을 먹지 않는 나의 고집에 나를 안쓰럽게 대하며 어쩔 줄 몰라 한다. 나이가 있는 사람은 몸을 좀 주물러 준다고 하지만 젊은 친구들은 아예 어떻게 할 줄 몰라 안절부절 한다. 그들은 평소에 약으로 모든 것을 해결했기 때문이다. 골방에서 홀로 끙끙 앓고 난 3일째 툴툴 털고 일어났다. 얼굴은 핼쑥해졌다.

▲ 변현단
농부, 작가전남 곡성에서 토종씨앗으로 토종순환농사를 짓는 농부. 낮에는 농사를 지으며 생활에서 얻은 지혜를 글과 말로 짓는다.

토종종자를 발굴, 증식, 확산하는 토종씨드림을 운영하고, 농부권을 찾으려는 전국토종농민회를 결성 첫걸음을 떼고 있다. 경기도 시흥에서 가난하고 소외받은 사람들이 모여 농사로 자립을 도모한‘연두공동체’운영하였다.

가난과 농사, 공동체를 화두로 쓴『연두』, 잡초에 대한 역설인 약이 되는 잡초음식『숲과 들을 접시에 담다』, 농인문 교양서인『소박한 미래』자립적인 삶의 교본『자립인간』, 시산문집『색부의 노래』를 썼다.
어린 시절, 코를 훌쩍이기만 해도 엄마는 머리를 없앤 콩나물 줄기와 대파 총백 뿌리, 흑설탕을 넣고 부뚜막에 하루를 재어 놓는다. 두꺼운 이불을 덮게 하고 땀을 내도록 한다. 콩나물 액기스 외에는 먹을 것을 따로 주지 않는다. 하루 꼬박 땀을 흘리고 나면 몸이 개운했다. 그제야 흰죽을 먹거나 밥을 달라고 하면 꼭꼭 씹어 먹도록 주문한다. 학교는 하루 이틀 결석이다.

체기가 있으면 엄마는 팔을 쓸어내리고 실로 챙챙 감은 엄지를 머릿기름을 묻힌 바늘로 딴다.
머릿기름은 바늘을 소독하는 일이다. 체기가 심하면 열 손가락과 발가락까지 모두 딴다. 까만 피가 나오면 “다 됐다” 한다. 때로는 소다를 타서 먹였다. 변비로 똥을 못 누면 할머니는 똥구멍에 들기름을 발라주고 힘주도록 주문한다. 배앓이가 있으면 양귀비를 끓여서 먹이기도 했다. 무엇보다도 “할머니 손은 약손”, “엄마 손은 약손”이라며 배를 주물러 주면 배는 어느덧 편해지곤 했다. 넘어져 무릎이 깨져 들어오면 침으로 발라주거나 언젠가부터 ‘아까정기’라는 빨간 약을 발라주었다. 불에 데었을 때는 감자를 갈아 부쳐서 화기를 뺐다, 발목을 삐면 찬물에 담가놓도록 하고, 통증이 심하면 생강을 짓이겨 부쳐주기도 했다. 생강은 감기에도 사용했다. 얼굴 이마에 엄청 큰 종기가 났을 때는 곪을 때까지 기다리다가 부모님의 대작전이 시작된다. 아버지가 발버둥치는 나의 팔다리를 잡고 엄마는 광목수건을 대고 두 손으로 짜서 고름을 빼내고 고약을 부치면 ‘끝’이었다. 고약이 나오기 전에는 대마기름을 발랐다. 아프면 집에서 치료를 했고, 집에서 치료를 해도 낫지 않거나 중병이라고 생각할 때야 한약방이나 한의원을 찾았다. 그때는 의사를 부르는 왕진도 있었다. 요즘에는 유명 인사가 아닌바 에야 왕진이란 없다. 죽어서도 사망선고를 받으려면 응급실로 가야 한다. 이렇듯 우리의 병환에는 언제나 할머니 부모님이 있었다. 흙속에서 뒹굴며 우리는 툭툭 털면서 일어섰고, 얼굴에 구정물이 줄줄 흐르면서 엿가락을 서로 차지하려고 술래잡기를 했다. 여자아이들은 머리를 쥐어뜯으며 쌈박질을 했다. 지금 생각하면 머리를 쥐어뜯는 것 때문에 두피가 튼튼했는지도 모른다. 유아시기를 무사히 넘긴 어린 시절, 전염병만 없으면 모두 건강하고 행복했다. 나는 지금도 그때를 생각하면 즐겁다. 시골 한여름 뜰에서 맘껏 놀고 검게 그을린 어린 친구들(촌년촌놈)을 보면 싱그럽기 그지없다.
 
언젠가부터 우리는 촌년 같다는 말을 싫어했다. 전국을 강타한 미디어 영화나 광고를 통해서 도시의 생활을 동경하도록 조작되었다. 소비를 강요한 기업이 우리의 것을 가로채고 난 뒤부터 이리 된 것이 아닐까. 그 때 그 시절이 가장 건강한 생활임이 지금 하나하나 드러나고 있는데도, 아직도 엄마의 사랑이란 자식이 아픈 것을 견디지 못해 병원에 달려가서 항생제와 수많은 약을 먹인다. 부모의 사랑이란 단 사탕을 주는 것이라 착각한 것이다. 약식동원을 잊어버리고 엄마가 일하러 나간 사이에 벌어지고 말았다. 

요즘 추석 차례 상에 올라오는 밥상을 보면 철이 없다. 돼지기름 소기름으로 전을 부치느라 내는 기름 풍미는 명절이나 잔치음식의 상징이었다. 전을 매일 먹는 것이 아니었다. 나물들은 참기름과 들기름 정도였다. 평상시에는 밥 한 공기와 장아찌와 국. 삼찬이 그만이었다. 명절이나 잔치 날은 뱃속에 기름을 칠할 수 있는 남녀노소 즐거운 날이었다. 소고기는 일 년에 몇 차례 정도만 먹었다. 소고기기름은 혈관의 온도보다 낮아 콜레스테롤을 축적시키는 것이므로 자주 먹을수록 해로운 것이라는 것을 조상이 알았는지도 모른다. 돼지 한 마리 잡는 것은 그래도 가끔은 마을에서 일어나곤 하였다. 닭은 사위 오면 잡아주고, 생일이나 몸이 허할 때 먹는 것이었다. 염소나 토끼, 꿩고기를 먹었고, 일상의 음식은 곡식과 들나물이었고 몸은 작고 가늘어도 젊은이라면 쌀 한가마니는 번쩍 들었다.

내 기억의 추석은 때때옷을 입고 고깃국을 먹는 날이었다. 엄마는 시집올 때 가져온 옷감으로 옷을 지어 주었다. 시장에 예쁜 옷이 나오기 시작한 이래로 그것을 사서 주면 그 옷으로 그 해 가을을 보낸다. 헤질 때까지 입기에 바느질은 필수였다. 옷은 겨우 두벌. 이렇게 겨울옷과 가을 여름옷 고작 한두 벌이 전부였고, 그것마저 동생에게 물려주는 것은 기본이었다. 신작로가 생기면서 나온 운동화도 2-3년을 신고, 큰 것을 사서 운동화 속에 종이를 넣고 다니게 했다. 뜀박질을 하면 벗겨지곤 하던 운동화. 그리고 명절 전에는 집에서 물을 데워서 때를 벗겼다. 물론 대중목욕탕이 생기기 전까지는. 처서가 지난 뒤부터는 추석까지 목욕을 하지 않는다. 명절 전날에 목욕하고, 설날 전날에야 대대적인 목욕을 했다.

아! 이런 생활, 누가 벗어나야 하는 가난한 것이라고 하는가? 이 생활은 바로 우리가 찾아가야 할 진정한 풍요로운 생활이 아니던가. 내 손으로 옷도 집도 음식도 만들어서 먹는 생활. 누구도 간섭할 수 없는 진정한 자립의 생활이지 않은가? 수많은 생명을 앗아가는, ‘소비’와 ‘경제’라는 미명하에 기업과 권력자들이 만들어낸 것이 아닌가? 세상 돌아가는 것이 너무나 절박한 지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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