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송태웅 / 시인
화개의 후배 집에 놀러갔다가 돌아오니 툇방 마루에 취나물 몇 줌이 검은 봉지에 싸여 놓여 있었다. 시골집으로 이주해 온 이후 이런 일은 종종 있던 터였다. 매실, 고추장, 고사리, 김치 등등이 신문지나 검은 비닐 혹은 한약방 이름이 적힌 헝겊 주머니 등에 싸여 툇마루에 놓여 있었던 것이다. 그러고도 그 익명의 선인들은 “그거 잘 먹었느냐?”, “집에 뭐 없더냐?”는 등의 힌트를 전혀 주지 않았다.

누가 나에게 그런 기쁨을 선사했는지 알아야 나도 그에 상응하는 앙갚음을 할 것 아닌가. 한동안 나는 그렇게 생각하고 살았다. 주는 대로 받고 받는 대로 주는 것이 내 생에 오래토록 축적된 습성이었다. 그 습성은 아주 강고해서 웬만해서는 변할 기미조차 보이지 않았다. 도시의 꽤 괜찮은 아파트에 살면서 연봉 4000~5000만 원을 챙겼었고 그럴 듯한 자동차를 몰았었다. 또 역사나 정치현실에 수준 높은 안목을 가진 선․후배를 동지나 술친구로 가지고 있었다. 현실에 대한 비판적 열정을 갖고 있었으면서도 실천적으로 항거하는 것은 늘 밥 먹고 사는 일 뒤로 미루었다. 내게 있어 합리적으로 사고하는 일은, 실은 손해 보지 않고 사는 일이었다. 삶과 세상에 열정적으로 참여하는 일은, 실은 최선을 다해 손해 보지 않으려고 하는 정도에 불과했다.

이러한 삶의 행태에 파열음을 가져온 것은 우연찮은 교통사고 덕분이었다. 2012년 2월, 나는 제주 강정에 해군기지건설을 반대하는 작가들의 릴레이 걷기에 참여 하였다. 임진각에서 국도 1호선을 따라 목포까지 걷고, 배로 제주로 건너가 우리의 뜻을 정부와 해군에 전달하는 동시에 힘겹게 반대투쟁을 전개하고 있는 강정 주민들에게 힘을 실어주기 위한 행사였다. 내가 맡은 구간은 광주에서 목포였는데 2박 3일을 꼬박 걸어 목포대 근처에 도달했다. 이제 한 나절만 걸으면 목포항까지 나의 임무가 완수될 상황이었다. 그런데 그 한 나절을 견디지 못하고 그만 자동차에 등을 치이고 말았다. 갈비뼈 3개 골절. 생애에 처음 당해보는 교통사고였다. 한 달을 꼬박 입원했다. 퇴원해서 보니 나를 감싸는 상황은 급변해 있었다. 나는 내가 누리던 모든 것을 놓아 버리기로 마음먹었다. 그 길로 지리산 피아골에 들어가 넉 달을 살았다. 나는 사람이 사는 마을로 내려가지 않고 더 높은 산정을 어슬렁거렸다. 거의 매일처럼 임걸령으로, 노고단으로, 반야봉으로, 불무장등을 넘나드는 산행을 했고 저녁마다 혼자 술을 마셨다. 그리고 얼마 되지 않던 돈도 완전히 고갈됐다. 빈털터리가 되니 더 솔직해진 내 자신이 다가왔다. 드디어 나를 지탱해주던 그 알량한 자존심 따위를 버리고 먹이를 찾아 민가 근처를 어슬렁거리는 짐승 한 마리가 될 수 있었다.

나는 밥을 벌기 위해 산림조합에 나가 등산로 정비작업을 하거나 비닐하우스를 해체하거나 새로 짓는 일 등을 하면서 근근이 사는 법을 배웠다. 잘나갈 때 한 달에 1000만 원 이상을 벌던 것은 이미 내가 아니었다. 지금, 여기 있는 나만이 나였다. 지금부터 살기 위해 지금까지 살아온 것이었다.

나는 지금 시골 마을의 농부로 늙어가는 것에 만족하고 있다. 이제 동네 형들은 못자리를 만들거나 고추를 따거나 논에 약을 칠 때 꼭 나를 부른다. 그리고 막걸리 한 사발을 내놓는다. 나는 기꺼이 그들의 부름에 달려가면서 익명의 선행에 대해 보답하려고 한다. 그리고 한때 자본의 한 부속품으로 만족했던 지난날의 나에 대해 반성한다.

간디는 마을공동체야말로 자본주의에 대적할 수 있는 유일한 대안이라고 말했다. “물레질과 같은 단순하지만 생산적인 작업의 경험은 정신노동과 육체노동의 분리 위에 기초하는 모든 불평등사상의 문화적ㆍ심리적 토대의 소멸에 기여할 것이다. 뿐만 아니라 ‘자기 먹을 빵을 손수 마련해 먹는 창조적 노동’에의 참여와 거기서 얻는 기쁨은 소박한 삶의 가치를 진정으로 긍정할 수 있게 하는 토대를 제공해줄 것이다.”

물론 간디가 정신노동 또는 정신노동자들을 타기했다고는 생각지 않는다. 그는 다만 육체노동 또는 육체노동자들이 소외되고 차별 받는 현실에 대해 비판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었고 어떤 노동 또는 노동자들이 평등하게 대우 받는 현실을 꿈꾸었을 거라 생각한다.

텃밭의 풀을 뽑고 있는데 마을 청년회 총무인 재선이 어머니가 고사리밭을 매고 지나가면서 빙긋이 웃으면서 말을 건네왔다. “취나물은 어떻게 먹었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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