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상준
소설가. 논설위원
지난 5월 17일 오후, 버드네 공원에서 5․18 추념 <순천문화제>가 있었습니다. 늦게 갔습니다. 참석 인원이 많지 않았습니다. 오월 맞아, ‘망월’에 가지 않으면 부끄럽던 시절을 겪던 때가 있었던지라 일하던 차림으로 씻지도 않은 채 늦게라도 갔던 건 그 시절의 부끄러움 놓지 못한 때문이었습니다. 내 기억 속의 5․18을 떠올려 봅니다.  
 
1980년, 교사 발령 첫 해, 어느 읍내 학교에서 오월을 맞았습니다. 이십대 중반의 나이. 교사가 되면 이런 선생이 되어야지, 하며 결기에 차 있던 첫날부터 교장 선생님에게 이른바 쪼인트 까이는 나날의 연속이었습니다. 별명이 찜빠였습니다. 찜빠란 동네북이란 속어쯤으로 쓰이는 단어입니다. 교장 선생님에게 매일매일 혼나지 않으면 소화불량 조짐을 화장실에서 찾기 일쑤였던 나날의 오월, 어느 날이었습니다. 읍내 방송에서는 폭도들이 읍내에 온다하니 모두 철저히 대비하라는 호령이 있었고, 나는 그들, 폭도들을 기다렸습니다.

폭도들을 부둥켜안고 울리라며 속으로 켜켜이 분노 움켜쥔 채 기다렸습니다. 밤 11시 가까이 되어 북을 두드리며 그들은 읍내로 진입해 왔습니다. 학교 숙직실에서 긴장 속에 기다리고 있다 내처 달려갔습니다. 그들은 대부분 두건을 쓰고 몇몇은 총을 들고 있었습니다. 퍼뜩 폭도처럼 느껴져 어둔 담벼락 뒤에 몸을 숨기고 숨 죽여, 두려움에 떨었습니다. 울었습니다. 내게 저장되어 있는 세뇌성 DNA의 표출… 말 많으면 빨갱이랄지, 공산당은 머리에 뿔이 나 있다랄지 하는 집요한 강요에 물들어 있는 나의 민주주의에 대한 하, 간장종지만한 그릇 탓하며 눈물 흘렸습니다.
 
며칠 뒤, 그들이 다시 왔습니다. 폭도가 아닌 당시 군부의 정권찬탈 음모에 대항하는 전사로 군민들의 환영 속에 두 대의 차에 분승해, 그들이 다시 왔습니다. 읍내에서 광주로 유학 간 학생들이 2박 3일 이상 걸어서 고향집에 와 들려준 처참한 참상과 똑같은 이야기를 하며 그들 또한 울었습니다. 나는 그들 따라 광주에 가려고 그들이 타고 온 차량 가운데 한 대에 올랐으나, 그 차는 고장으로 멈춰 서 있었습니다. 또 한 대의 차는 벌써 저만큼 앞서간 뒤였습니다. 그렇게 광주 오월을 맞았습니다. 교사로서 아이들에게 민주주의를 이야기하던 나의 입이, 눈이, 귀가, 손과 발이, 가슴이 너무도 부자연스럽고 부끄러워 호흡하기 어려운 상황에 빠져들었습니다. 교사이면서 장발을 고집하던 나는 머리를 박박 밀어버렸습니다. 지금도 그 사진을 가지고 있습니다. 참담했습니다. 열병을 앓았습니다.

오월 전과 오월 후의 나의 교사적 삶이 달라졌습니다. 소위, 쌈꾼교사 혹은 벌떡교사가 되었습니다. YMCA중등교사협의회를 거쳐, 86년 5․10교육민주화 선언 참여, 카톨릭농민회 활동, 전교조 관련하여 해직될 때까지 이러저러한 교사생활하다 오늘에 이르렀습니다.
 
올해로 동학 121주년, 5․18 35주년이 되었습니다. 6월 6∼7일, 양일간 우리학교 35명의 학생과 선생님 몇 분이 역사캠프를 떠납니다. 대학입시에 대비한 인문학 관련학과 진학 예정자를 위한 스펙 쌓기 교육활동이기도 합니다. 동학혁명 유적지와 전주 한옥마을 그리고 ‘망월’을 다녀오게 될 아이들을 떠올리면서, “내게 오늘의 ‘광주’는 무엇인가? 오늘의 ‘오월’은 내게 어떻게 용해되어 있는가? 5․18은 지금 내게 어떤 사유의 관점에서 작동되고 있는가?” 묻습니다. 나의 사유의 주요한 원천이기도 했던 때문입니다. 우리 아이들은 동학과 오월을 어떻게 만나고 올지 궁금합니다. 입시를 위한 스펙 쌓기로만 느끼고 오진 않을까? 자못 염려스런 마음입니다.

<순천문화제> 중간에 부끄러움 무릅쓰고 일어났습니다. 약속이 있어서였습니다. 약속을 핑계 삼아 일어서는 동작의 정수리엔 혹 동학과 오월을 스펙 쌓기로 만나고 올지 모르는 어느 아이의 의식에 이르러 있는 건 아닌가? 자문하면서 말입니다.

오월의 봄, 시론 아닌 시론을 쓰고 있는 지금, 저 ‘오월의 시대’로 돌아가버린 한국사회가 참담하게 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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