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천지역 역사·문화유적을 찾아 ④

거차마을에서 우명마을까지 이어지는 순천만의 남쪽 마을들은 각 마을 유래와 함께 우리 고유의 마을 이름과 그 마을 이름들의 안타까운 변화 과정을 극명하게 보여준다. 한자어로 흔히 ‘바다 쪽으로 좁고 길게 내민 땅’은 곶(串), ‘바닷물이 드나드는 곳’은 포(浦)라고 한다. 거차(巨次) 마을은 천마산 자락이 바다 쪽으로 길게 머리를 내민 곶을 중심으로 마을이 형성되어 있으며 1789년 ‘호구총수’ 기록에는 거차을포(巨次乙浦)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에 대해서 두 가지의 해석이 있다. 하나는 거차 마을의 우리말 이름은 ‘거칠게 생긴 갯마을’이라는 뜻의 순우리말 ‘거츨개’였는데 이를 한자로 변환하면서 거차을포(巨次乙浦)가 되었고 이를 줄여 거차(巨次)로 부르게 되었다는 설이며, 다른 하나는 ‘바다 쪽으로 좁고 길게 내민 땅’ 곧 곶(串)에 위치한 마을이라는 뜻으로 ‘곶’이라 부르던 것을 ‘고’는 거(巨)로, ‘-ㅈ’은 차(次)로 표현하여 거차(巨次)가 되었다는 설이다. 즉 ‘거차’는 ‘곶’의 다른 표기라는 것이다. 하지만 이 두 가지 설 중 어느 쪽이 진실인지 지금으로서는 아무도 알 수가 없다. 단지 역사만이 알고 있을 것이며 우리는 그저 미루어 해석할 따름이다.

그런데 이 거차마을에는 마을 이름보다 더 다양한 이야기가 전한다. 그 중 하나는 ‘천마산(天馬山)과 혼여(魂山與)’의 전설이다. 한 장군이 말을 타고 순찰을 하다가 매복한 적의 화살에 맞아 죽자 주인 잃은 말은 그 자리에서 멈추어 산이 되었는데 그 산이 천마산(天馬山, 147m)이요, 장군의 몸은 바다 가운데에 떨어져 여(山與 : 물속에 잠겨 보이지 않는 바위. 암초)가 되었는데 만조가 되면 그 여의 모습이 마치 사람이 죽어 떠있는 것처럼 보여 그 여를 혼여(魂山與)라고 부른다는 이야기이다. 실제로 혼여는 거차마을 방파제에서 10시 방향의 바다 가운데에 있으며 이름처럼 만조가 되면 마치 사람의 시신이 물에 둥둥 떠 있는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다른 하나는 조선 후기에 낙안군수로 왔던 임경업 장군과 관련된 이야기이다. 조선 후기 조현범 선생의 ‘강남악부’ ‘백마포(白馬浦-‘거차포’를 지칭하는 말)’조에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전한다.

임경업장군이 낙안군수로 와 있는 동안 항상 백마를 타고 거차포 뒤 천마산 최고봉에 올라가 돌아다니며 구경하는 것을 즐겼다. 장군이 임기를 마치고 서울로 올라간 후 병자호란이 일어나고 장군은 억울하게 죽임을 당했다. 그 뒤 거차포 사람들이 장사를 하기 위해 배를 바다에 띄우려고 하자 임경업 장군이 꿈에 나타나 백마를 타고 갯머리에 올라서서 떠나지를 않았다. 갯가 사람들이 처음에는 괴이하게 생각하면서도 마음에 크게 두지 않았는데 여러 차례에 걸쳐 파선 당하게 되자 크게 놀라 한 칸 모옥을 산 위에 짓고 임경업 장군의 신위를 받들고 제사를 드렸다. 이후부터 파선을 당하지 않았으며 이익도 전보다 갑절이나 되었다. 하지만 지금은 사당을 흔적을 찾을 수도 없고 마을에서 사당 내력을 아는 이도 없다.

거차마을 옆에는 고장마을이 있다. 원래 ‘곶의 안쪽에 있는 마을’이라는 뜻의 ‘곶안’마을이었던 것이 1914년에 일제에 의해 행정구역이 개편되면서 고장(庫藏)이라는 한자 이름을 갖게 되었다고 한다. 새해 첫날 해맞이 명소로 자리잡고 있는 화포(花浦) 마을의 우리말 이름이 ‘곶개’다. 곶(串)은 뭍이 바다로 내민 부분이고 개는 바닷물이 드나드는 곳이니, ‘곶개’가 역시 한자 옷을 입으면서 ‘곶’의 발음이 ‘꽃’과 비슷하다고 하여 ‘꽃 화(花)’로 바뀌고, ‘개’는 바닷가 포(浦)를 써서 화포(花浦)라고 부르게 된 것이다.

 
화포마을(사진) 인근의 우명 마을의 마을 이름 변화는 더욱 기괴하다. 그 중 하나는 바다 건너 해룡의 와온이 큰 소이고 우명 마을 뒤의 봉화산은 새끼소로 우명 마을의 형상은 ‘소가 우는 형국’이므로 ‘우명’(牛鳴)이라고 했다는 설이다. 다른 하나는 우명마을이 ‘움푹 들어간 곳에 자리 잡은 마을’로 ‘움푹 들어간 마을>옴막구미>움막>움머’로 변화된 것이 ‘움머’가 ‘소 울음’으로 와전되어 한편으로는 쇠울이>쇠우리>쇠리의 과정을 거쳐 ‘쇠리’ 마을로 불리게 되었고, 다른 한편으로는 ‘소(牛, 우) 울음(鳴, 명)’이 우명(牛鳴)으로 되었다는 설이다. 그리하여 지금도 화포 바닷가 근처에는 ‘쇠리’를 상호로 사용한 식당을 볼 수가 있다.

결국 ‘곶’이라는 말 한마디에서 ‘거차’가 나오고 ‘곶안, 고장’이 나오고 ‘곶개, 화포’가 나왔으니 순천만의 역사와 더불어 순천만 주변의 마을 이름도 참으로 많은 변화를 겪어왔다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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