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천을 걷다 첫번째 길

아침 910분 전쯤, 출발 장소인 남문터 광장에 도착했다. 아주 가는 비가 조금씩 내리고 있어서 순천을 걷다.’라는 주제로 순천 걷기 활동을 시작한 첫 번째 날인 오늘은 몇 명이나 참여할지 염려가 되었지만 9시가 가까이 되자 회원들이 하나둘씩 나타나더니 모두 10명이 모였다. 모두 순천을 공부하고 순천을 사랑하는 열정이 대단한 분들이다. 이번 걷기의 길라잡이 역할을 맡기로 한 나는 태블릿 PC를 이용하여 1872, 조선 고종 때 작성된 순천지방도를 보여주며 당일 걷고자 하는 조선육군, 순천왜성 출정길1598년 무술년 당시의 길을 추정해 설명하며, 단 안전과 편리함을 고려하여 우리는 당시와는 다른 길로 걷겠다고 안내를 했다.

오늘 우리의 걷기는 정유재란의 막바지에 해당하는 무술년, 선조 31(1598) 9월 후반부터 10월 초에 전개되는 조명연합 수륙군의 순천왜성 공격 당시에 순천부 읍성 주변에 머물고 있던 조선 군인이 순천왜성에까지 진군했던 길을 상정해 두고 걸어보는 것이다. 1872년의 순천지방도를 통해 현재 동천의 조곡교 부근이 매우 폭이 넓어 마치 저수지와 같았다는 것과 그 가운데 우선정(遇仙亭)이라는 정자가 있었다는 것, 그리고 동천을 건너기 전에 환선정(喚仙亭)이라는 정자와 활을 쏘는 사정(射亭)이 있었다는 것 그리고 당시에 동천에는 현 장대다리 부근에 나무다리가 하나만 있었다는 것 등을 확인하고 걷기가 시작되었다.

사실 이번에 참여한 분들은 대부분 평소 순천에서 각종 해설사 활동이나 지방자치 활동 혹은 봉사활동 등에 매우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분들이라 순천에 대해서 많은 것을 알고 있는 분들이라서 비록 이번 걷기의 길라잡이는 내가 맡았지만 걸으며 주고받는 이야기 속에는 내가 새롭게 알게 되는 내용들이 매우 많았다. 다른 집단 같았으며 조곡교를 건너 왼쪽으로 70m 쯤 가면 있는 ‘8.28 수해 위령탑을 돌아보고 간단히 설명을 해야 했지만 이번 참가자들은 순천의 그런 중요한 역사 정도는 잘 아는 분들이라서 생략하고 동천을 따라 걷기 시작했다. 옛 전라선 철도를 철거하고 새롭게 조성한 길을 따라 조금 걸으니 장대공원이 나타났고 도로(이수로)를 지나기 전, 신호등 때문에 잠시 멈춰있는 도로 건너에 여순공원표지판이 나타났다. 굳이 여수순천 1019사건’(약칭 여순사건)제주 43 항쟁을 비교하면 그 발발동기와 희생의 규모 등에서 분명 차이가 있으나 지역 시민 단체의 조사를 통해서 여순사건 때 지역에서 희생된 인원이 근 1만 여명에 가깝다는 점을 고려하면 제주 43 항쟁희생자들을 추모하기 위해 만든 제주 43 평화 공원과 비교하면 너무 초라한 규모이기에 개인적으로 불만이 많았다. 그래서 국가적 차원에서 좀 더 큰 규모의 추모 공원을 건립해 주어야 하지 않겠느냐는 의견에, 여수에서는 순천에 여순공원이 있다는 것조차도 기분 나빠한다는 누군가의 말을 들으니 국가적 차원의 추모 공원 건립을 바라기 전에 우선 여수와 순천 사람들의 의견 통합이 먼저라는 것을 느꼈고, 결코 쉽지 않은 일이 될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안타까운 일이다.

보수 여당 정권(당시 박근혜 대통령) 때 어떻게 순천만 정원이 국가정원 1호가 될 수 있었는가?’, ‘2023순천만국제정원박람회 기간 동안 아스팔트를 걷어내고 잔디밭은 조성한 도로를 그대로 잔디밭으로 존치하는 것이 환경에는 어떤 영향이 있을까?’ 등 지방자치와 환경 문제에 관심이 많은 참가자들과 이야기하며 걷는 사이에 우리는 벌써 순천만 국가정원이 있는 동천교 다리에 다다랐다. 만약에 순천만 국가정원이 아니었더라면 우리가 걸어온 동천길을 따라 계속 순천만 쪽으로 걸어 내려갈 수 있었지만 순천만국가정원 때문에 가로막혀 있었기 때문에 우리는 순천만국가정원을 돌아서 연향천을 따라서 걷기 시작했다.

이렇게 이동해 오는 사이에 유독 일해의 대화에 함께 하지 못하고 맨 뒤에서 우리가 걷는 길에서 만나는 화장실이나 편의시설 등을 휴대폰 지도에 메모해 가며 오는 참가자가 있었다. 내가 재직했던 순천효천고등학교의 현직 한국사 교사인 정균식 선생님이었다. 선생님은 지도 과목이 한국사이기 때문에 이런 걷기 모임에 참여하여 지역의 역사와 문화에 대해서 더 많이 알고 공부하면 학생들을 지도하는데도 많이 도움이 될 것이라고 참여를 권유하여 참여하였지만 사실 이번 활동에 참여한 분들과는 대부분 초면이라서 아직 낯설을 것이 분명했다. 참여자들의 나이도 대부분 50대를 넘겨서 아직 30대 후반인 선생님으로서는 함부로 대화에 끼어들기도 조심스러울 터이다. 하지만 선배 교사의 권유로 참여했지만 아마 정선생님은 우리 활동에 많은 도움을 주고, 자기 자신도 우리 지역에 대해서 많이 배우고 느끼는 기회가 될 것으로 생각한다. 개인적으로는 장차 향토사를 연구하는 연구가가 되기를 바라고 있는데 아쉽게 사는 곳이 광양이다. 평소 순천, 여수, 광양은 여러 가지 면에서 통합을 해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는 나로서는 정선생님 때문이라도 빨리 통합이 되었으면 억지스런 바람을 가지고 있다.

순천만 에코촌 유스호스텔에 도착하니 벌써 걸은 지 1시간 30분이 지났으며 잠시 휴식을 취하기로 하였다. 쉬는 동안 우리들의 대화 소재는 순천만 에코촌 유스호스텔이라는 이름의 적합성 문제였다. 순천시도로명주소위원회 위원으로 오랫동안 참여하고 있지만 언제가 회의 때 왜 굳이 한옥으로 된 숙소의 이름을 에코촌 유스호스텔로 정했느냐? 순천만 한옥마을, 혹은 순천만 한옥촌 정도면 좋았지 않았느냐?”라고 당시 참여했던 공무원에게 물으니 당시 정부에서는 에코라는 말이 들어가지 않으면 허가를 잘 내주지 않았다.”라고 대답하는 것을 듯고 당시 정부 고위층들의 영어 사대주의에 실소를 금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아무튼 우리는 순천만 에코촌 유스호스텔이라는 혼란스런 이름으로 한동안 논쟁을 벌였다. 물론 모두 부정적인 의견으로 개칭이 필요하다는 의견이었다.

휴식이 끝나고 다시 걷기 시작하며 원래는 홍내교길을 따라 걸으면 코스가 간단하지만 그 길은 인근에 있는 축산가공시설(일명 도축장)을 이용하는 차들의 왕래가 많으니 우리는 농로를 이용하여 걷겠다.’고 양해를 구했다. 사실은 농기구들이 잘 다닐 수 있는 콘크리트 포장도로라서 걷기에는 전혀 지장이 없는 길이지만 사실 이런 길은 그냥 좁은 흙길이어야 제 맛일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보기에 좋지도 않은 콘크리트 포장길이지만 양쪽으로 펼쳐진 너른 논 사이를 걸으며 지금까지 걸어왔던 길과는 또다른 감정을 자아내는 듯 했다. 비록 5월 모내기 후의 파란 들판 혹은 늦가을 추수하기 직전에 벼들이 노랗게 익어가는 들판을 생각하면 아직 겨울이 지나지 않아 썰렁하기만 논바닥만 볼 수 있는 지금의 풍광이 그다지 아름답지도 않지만 그대로 흙을 보며, 논바닥을 보면 걷는 것조차 참가자들에게는 새로운 감흥을 불러일으키는 듯 했다. 역시 사람들은 흙을 보며 살아야 하는 존재인가 보다.

어느덧 해룡 농수산물 시장을 지나게 되자 오른쪽으로 검단산성의 모습이 보였고, 아직 12시도 안된 시간이지만 검단산성을 본 참가자들은 이제 거의 다 왔네!’하면서 좋아들 하신다. 아직도 멀었는데 말이다오른쪽에 검단산성을 두고 왼쪽에는 신대 지구의 작은 산 봉우가 보일 때 쯤 내가 여담을 한마디를 건냈다

우리나라 산봉우리 중 가장 많은 이름의 봉우는 무엇일까요?”

이미 그 산봉우리의 이름을 아는 참가들은 옥녀봉이요.’하고 어떤 분들은 장군봉이요.’라고 한다. 실제로 옥녀봉과 장군봉은 우리나라에서 정말 흔한 산봉우리 이름이다. 내가 약간의 부연 설명을 했다.

우리나라의 산봉우리 중에는 산 정상에 큰 바위가 있으면 장군봉, 작은 봉우리가 볼록 솓아 있으면 옥녀봉이라고 합니다. 왜 그런지는 아시지요?” 모두 성인들이니 내가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모두 알아 듣으셨을 것이요, 나 또한 더 이상 설명하지는 않았다.

우리나라에는 장군봉이 전국적으로 45개쯤 있구요, 옥녀봉은 그보다 조금 더 많습니다. 그러면 장군봉과 옥녀봉 보다 더 많은 이름은 무엇일까요?”

사실 우리 국토 곳곳에 정말 많은 이름인데 쉽게 답이 나오지 않았다.

우리 순천에도 있습니다. ‘국사봉입니다. 나라가 하도 외침을 많이 맞다보니 나라를 지키겠다는 염원을 담아 봉우리 이름도 국사봉이 가장 많은 것 같습니다. 특히 침략이 많았던 북쪽으로 올라갈수록 많습니다.”

실제로 국사봉이라는 이름은 남한만 해도 50개가 넘으며 아마 한자로는 대부분 國師峰이라고 쓸 것이다. 오늘의 걷기도 그 외침 세력을 무찌르기 위한 진군로를 걷는 것이지만 나라가 외침을 많이 받아 국민들이 많은 고통을 겪은 기억들은 결코 좋은 기억일 수는 없다. 그런 의미에서 지금도 많은 귀한 생명들이 포탄 속에서 쓰러져 가고 있는, 러시아가 일으킨 침략전쟁과 이스라엘이 일으킨 보복 전쟁, 모두 당장 그만두어야 한다. 벌써 사망자가 수십만이 넘었다고 하는데, 각국의 후손들에게, 각국의 역사에 또 얼마나 많은 상처와 아픔, 원한과 복수심을 심어줄 것인가!

이제 그만 "STOP! N0 WAR!"

대법 마을에 이르니 어느덧 12시가 가까이 되고 있었고, 아침을 일찍 먹고 나온 참가자들은 서서히 배고픔을 느낄 때였다. 대법마을 정자에서 점심 식사를 했으면 했지만 대부분의 참가자들은 검단산성 위에서 식사를 하잖다. 그래서 결국 이미 많이 힘들고 지친 몸을 이끌고 제법 가파른 산길을 따라 올라가 검단산성 정상에 올랐다. 시원에게 펼쳐진 사방의 모습, 발굴 후 복원하여 잘 정비된 검단산성 정상에는 우리가 모두 모여 함께 점심 식사를 하기에 매우 적합한 자형 의자가 있었다. 그렇게 우리는 각자가 싸온 도시락을 꺼내어 맛있게 나누어 먹으며 정말 모처럼 소풍을 온 기분으로 식시를 즐겼다. 김밥이 많았지만 보름이 막 지난 때라서 보름 음식도 많았고 또 인기도 좋았다. , 참가자 중 술을 좋아하는 누구는 오는 길에 몰래 막걸리는 몇 병 사와서 또 풀어 놓았다. 우리 모임의 취지 중 음주 걷기는 피한다.’는 규정은 첫 회만에 사장되어야 할 처지가 되었다. 어쩌겠는가! 이렇게 술이 좋다니.. 이게 술을 좋아하니...

맛있는 점식식사 후 복원된 우물까지 검단산성을 전체적으로 둘러본 후 우리는 오늘의 주 목적지인 순천왜성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 그런데 도중에 두 갈래의 길을 만났다. 한 길은 곡선으로 돌아서 정유재란 당시에 순천왜성에 주둔한 왜군들이 길러먹었다고 하는 '왜군정'이라고 부르는 오래된 우물이 있는 선월마을을 스치고 지나가는 길이고, 다른 하나는 직선으로 뻗은 지름길이었다. 혹시 힘들어하는 분들이 많으면 지름길을 택할 수 밖에 없다는 판단으로 어떤 길을 원하느냐고 물으니 일행은 모두 돌아서 가잔다. 역시 모두 열정이 대단한 분들이다. 뒤이어 함께 시민단체 이사장님의 쐐기를 박는 한 마디.

"우리 활동에 지름길은 없습니다!"

이 말에 모두 환호로써 동의해 주니 나는 바로 돌아가는 길을 택해 앞장서 걷기 시작했다. 그렇게 찾아간 선월마을의 왜군정은 비록 예전에 우물을 보호하기 위해 벽돌 담벼락이 둘러져 있어서 우물의 가치를 알 수 있었으나 아직도 맑은 물이 괴어 있는 우물에는 쓰레기가 많이 있었고 우물 근처에는 우물의 수원에서 물을 빼가기 위한 농업용 모터와 호스가 연결되어 있었다. 이미 그 모습을 여러번 본 나와는 달리 처음 본 참가자들은 사뭇 충격을 받은 듯 했다. 비록 문화재로 지정되어 있지는 않을지라도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는 소중한 우물인데 너무 관리가 부실하게 되어 있기 때문일 것이다.

선월마을에서 나와서 왜성가는 길에 우리가 발길을 멈춘 마지막 장소는 2021년에 순천시에서 옛 충무초등학교 자리에 조성한 '순천 정유재란 역사공원'이었다. 나는 물론이고 참가자 대부분이 이미 몇 번이나 방문했던 곳이지만 매번 그 초라함과 협소함에 실망감을 감추지 않을 수 없다. 물론 순천시의 잘못은 아니다. 영남 지역 임진.정유왜란 유적지들이 크고 화려하게 성역화되어 있는 것과 비교하면 역사적 중요성을 고려할 때 우리 고장의 유적들은 그냥 방치되어 있거나 너무나 초라하게 복원되어 있는 것이다. 정치 권력이 나라를 움직이고 나라의 돈을 움직이는 세상인데 오래전부터 정치적 소외지역이었던 우리 지역에서 무엇을 바랄 수 있었겠는가!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역사공원을 벗어나다 또한번 실망스런 광경을 맞게 된다. 바로 '순천정유재란역사공원'이라고 새겨진 커다란 돌표지판이다. 그 표지만의 글씨가 우리 지역과, 또한 정유재란과 전혀 관계없는 도올 김용옥 박사의 글씨이기 때문이다. 그분이 역사학자가 아니면서도 우리 역사에 대해 해박한 지식을 가지고 있으며, 순천에 와서 정유재란 당시 순천의 역할이 매우 중요하였음을 열변한 강의를 하기도 했지만 왜 굳이 그 분이어야 했던가? 개인적으로는 이런 현상을 '문화적 사대사상'이라고 말하고 싶다. 굳이 이순신 장군이 아닐지라도 우리 지역에는 정유재란 당시 큰 공을 세웠던 위인들이 얼마나 많은데... 차라리 그 분들이 남긴 문집 중 집자를 해서라도 만들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는 아쉬움이 있는 것이다. 그래도 다행이다. 당시 순천시장의 글씨를 새기지 않은 것만으로도.. 표지석 뒷면에 새겨져 있기는 하지만...

순천을 걷다
순천을 걷다

드디어 순천왜성에 도착했다. 복원해 놓은 해자와 문루들과 그 관리 상태가 모두 실망인 것은 나뿐만이 아니지만 더욱 아쉬운 것은 당시 조선 육군은 왜군이 이 성에 주둔하고 있을 때 우리처럼 이 성에 오르지 못했다는 점이다. 당시 노량해전이 끝나고 어수선할 때 순천왜성에 주둔하고 있던 고니시 유키나가가 지휘하는 왜군은 아무일도 없이 남해로 빠져나가 부산으로 그리고 일본으로 돌아가게 되고 그로써 임진정유 7년 전쟁이 끝나는 것이다. 결국 임진정유 7년 전쟁은 바로 순천왜성전투의 연장선인 노량해전에서 이순신장군이 순국하고 고니시 유키나가 군이 순천왜성을 안전하게 빠져나감으로써 마감되니, 순천왜성전투는분명 '임진정유 7년 전쟁 최후의 전투'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그 의미가 크다고 느끼는 만큼 현재 순천왜성 주변과 정유재란 유적들의 현재 상황이 매우 초라하게 느껴지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다. 다만 순천왜성 주변이 이 정도라도 보존되고 관리되고 있는데는 오늘 걷기활동에 참여한 참가자들이 속해 있는 시민단체의 역할이 매우 컸다는 점은 자랑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나 또한 같은 단체 회원으로 29년 전, 정유재란 유적을 지키기 위해 활동했던 기억과 또 몇 해 전에 순천왜성 전투와 충무사를 소재로한 책을 써서 우리 지역에서 펼쳐졌던 정유재란의 역사와 우리 지역의 역할 그리고 그 전쟁이 우리 지역에서 갖는 의미 등에 대해서 알리는 활동을 했음을 매우 자랑스럽게 생각한다.

모든 참가자들이 무사히 완보하고 순천의 역사와 문화 등에 대해 많이 보고 배울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되어 오늘의 걷기 활동은 크게 성공했다고 생각하며 참가자들 또한 그렇게 평가하리라고 믿는다. 즐겁고 행복하 걷기였다. 오늘 걸은 거리는 약 21km, 총 걸음걸이 수는 대략 3만보였다.

저작권자 © 순천광장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