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머니는 하나 뿐인 아들이 보고싶어 시도때도 없이 눈물지었다”

백발이 성성한 노구가 됐어도 손자 최원석 씨(75)는 어렸을 때부터 각인된 그 모습이 사그라지지 않는다. 영문도 모른 채 경찰에 잡혀간 생때같은 아들, 최만수 씨가 불귀의 몸이 된 사실에 할머니는 평생 슬픔에 갇혔었다.
백발이 성성한 노구가 됐어도 손자 최원석 씨(75)는 어렸을 때부터 각인된 그 모습이 사그라지지 않는다. 영문도 모른 채 경찰에 잡혀간 생때같은 아들, 최만수 씨가 불귀의 몸이 된 사실에 할머니는 평생 슬픔에 갇혔었다.

그 때 최만수 씨 나이 22살에 불과했다. 신혼의 달콤함과 갓 태어난 아들 보는 재미에 푹 빠져있을 때였다.

“8월 경에 집으로 갈 수 있으니 이제 면회오지 말고 기다려라”는 아들의 말을 숨을 거둘 때까지 할머니는 곱씹었다. 교통편이 말도 못하게 불편했던 그 옛날에 순천 서면에서 김천형무소까지 수 만리 길을 마다않고 한걸음에 달려가곤 했던 할머니는 “아들이 총살당했다”는 소리에 그 심정이 어땠을까. 6월에 6.25 전쟁이 일어나 최만수 씨는 군 트럭에 올라탄 뒤 소식이 없었다.

할머니는 이내 정신을 차리고 대전으로 김천으로 사방팔방을 뒤지기 시작했다. 아들의 시신만이라도 건지고 싶은 간절함 때문이었다. 가는 곳마다 형체마저 허물허물한 시체들이 산을 이루며 나뒹굴었지만 할머니는 전혀 개의치 않았다. 할머니는 그저 “아들아, 아들아, 도대체 어디에 있느냐..제발 내 앞에 나타나다오”라고 중얼중얼거리면서 반 실성상태였다. 시신을 찾으러 동행한 유족들중 한 사람이 전해준 말이다.

“손자인 내가 없었더라면 할머니는 아마 생을 마감했을 정도로 힘들게 살았다”며 최원석 씨는 울음을 삼켰다.

손자인 최 씨는 당시 돌을 지난 갓난아이였다. 아버지의 빈자리는 경제적인 어려움으로 이어졌다. “초등학교를 9살에 입학했으나 4학년도 못마치고 중퇴했다”던 최 씨는 “안해본 일이 없었다”고 그동안의 회한을 털어냈다.

최 씨는 여섯 자녀들과 아내의 생계를 위해 긴장의 끈을 놓지 않고 살았다. 치열하다는 말은 그 앞에서는 오히려 사치스러울 정도였다고 한다.

최 씨는 “우리 때는 외국에 노동자로 나가 일하면 큰 돈을 벌 수 있었는데 나는 아버지의 전력 때문에 번번이 신원조회에서 탈락됐다”고 말했다. 아버지의 빨간줄 전과는 다 큰 아들의 발목을 끝까지 놓아주지 않았다.

다섯 살 무렵 재가한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이 하늘까지 닿았다고 밖에 볼 수 없는 일이 일어났다. 최 씨는 여수 인근에 있는 지인의 초상집에 가는 길에 기적처럼 어머니와 재회한 이야기를 들려준다. “가는 길에 배고파서 식당에 들러 음식을 주문하고 있었는데 불쑥 들어온 아주머니를 보고 한 눈에 어머니인줄 알아봤다”던 최 씨는 무작정 그분을 향해 “어머니”라고 불렀다. 그녀도 자신을 당장 알아보고 그 자리에 얼싸안고 밤새 펑펑 울었다. 최 씨 나이 25살 때였다니 햇수로 따지면 20년만이다. “지금 생각해도 믿기지 않는다”던 최 씨는 그 후로 1년에 한 번씩 자신이 가꾸던 과수원에서 수확한 감을 보따리에 싸서 어머니 집에 갔다. 어머니는 10년 전에 돌아가셨다.

최 씨는 아버지 만수 씨의 억울함이 76년만에 풀렸을 때 하염없이 울었다고 한다. 어떤 말로도 형언할 수 없었음은 짐작되고도 남는다.

“판사 앞에서 아무 말도 못하고 그저 울기만 했었다”던 최 씨는 “아버지에 대한 기록이 다행히 김천형무소에 남아있어서 무죄판결을 받아낼 수 있었던 것 같다”고 말했다. 천상의 신도 무심하지 않았다는 말은 최 씨에게는 위로가 되지 않는다. 이미 최 씨와 할머니는 고통을 받을만큼 받았기 때문이다.

최만수 씨는 1948년 10월 말 경에 아내의 친정 집에 들렀다가 집에 오는 길에 서면 경찰지서에서 연행됐다. 여순 반란군에 협조했다는 이유에서다. 여순지역을 탈환한 정부 진압군은 무차별적으로 주민들을 잡아다가 재판도 거치지 않고 총살시키거나 군법회의에 회부했다.

최만수 씨는 징역 5년형을 선고받고 김천형무소에 수감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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