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수·순천 10·19 일부 희생자 유해발굴 73년만에 이뤄져

아버지가 총살돼 파묻혔다는 장소에 물어물어 왔다. 누구하나 대놓고 가르켜주지 않아 매장지 주위만 파헤친 지도 수일 째다. 새카매진 가슴은 어머니에게서 열 두 살인 아들로 타고내려 갔다.

“막상 헤쳐보니 시신이 엉겨붙은데다 썩어 문드러져 누가 누군지 분간이 안돼 도저히 수습을 할 수 없어 다시 흙으로 덮을 수 밖에 없었다”고 당시를 회상한 이근선씨(87)의 목소리가 가늘게 떨렸다. 당시는 한나절만 놔둬도 음식이 상할대로 상하는 백중일 무렵이었다.

1950년 7월 초순경 여수·순천 10·19 부역이나 보도연맹 가입 혐의를 받은 구례 주민들은 모두 경찰에 붙잡혔다. 아버지 이기호씨도 그들 무리에 섞였다.

“경찰들의 조치로 그 때 경찰서 옆에 살았던 어머니가 구금된 주민들에게 음식을 날라줬는데 한 열흘 후엔가 밥과 반찬을 싸갖고 갔더니 유치장이 휑하니 비어 있었다”

이 때부터 이씨 가족들과 마을 주민은 백방으로 이들을 수소문했다. 구례경찰서 직원들은 “모른다”고만 답했다. 백주 대낮에 민주주의에서 일어난 일이라곤 믿을 수 없는 일이었다.

이씨는 “가족들이 모두 지쳐갈 무렵 7월 25일쯤에 국군과 경찰이 후퇴하고 인민군들이 구례를 점령했는데 인민군들이 행방을 알려줬다”고 말했다. 광주교도소로 이송도중 담양 인근에서 총살당해 매장됐다는 청천벽력같은 소식이었지만 가족들은 목놓아 울 여유조차 없었다.

가족들과 다른 주민들은 매장지로 알려진 그 일대를 샅샅이 뒤지기 시작했다. 마침내 7월 말경 아버지와 주민들의 시신이 묻힌 곳을 발견했다.

“죽임을 당한 주민들의 가족들 30여명이 모여 지난 1960년 초부터 매장지 주변을 벌초하고 제사를 지냈다”던 이씨는 “지금은 제사에 동참한 이는 대여섯명 밖에 안된다”고 말한다.

억울하게 죽은 이들에 대한 위령제가 2010년부터 진행되다 유해 발굴작업이 73년만인 11월 15일에 이뤄졌다. 이씨는 “아버지 시신을 수습도 못하고 죽을 일이 너무나도 안타까웠는데 드디어 아버지 유해를 거둬 안치할 수 있게 돼 천만 다행이다”며 눈시울을 적셨다.

올해 87세인 여순1019 희생자 유족 이근선씨는 "아버지를 비롯한 마을주민 30여명에 대한 유해발굴작업이 이뤄져 천만다행이다"고 말한다.
올해 87세인 여순1019 희생자 유족 이근선씨는 "아버지를 비롯한 마을주민 30여명에 대한 유해발굴작업이 이뤄져 천만다행이다"고 말한다.

 

저작권자 © 순천광장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