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정우
민들레하나한의원 원장
구봉산 정상에 다 올랐을 때까지도 동이 틀 기척은 없었다. 하늘과 바다의 구분은 여기저기 떠 있는 배들의 조명등으로만 가늠할 수 있었다. 하늘에 뿌려진 별들이 한산사에서부터 우릴 따라 올라왔다. 조금 지나자 그리 많던 별들이 차츰 자취를 감추고, 남서쪽에 높이 뜬 목성의 빛만이 홀로 묵묵히 버티고 있다. 동쪽 하늘부터 검은 먹물 색에서 푸른 포돗빛으로 서서히 변해간다. 저기 먼 바다 위 구름에 새끼손가락만큼 살짝 붉은 기운이 보이다가, 동남방 한쪽으로 번지기 시작한다. 붉은빛은 동쪽 전체 바다 끝 경계를 그으며 선을 이룬다. 그 빛은 여수항 곳곳을 땅과 바다로 구분 짓는다.

밤 동안 밝게 비추던 항구의 가로등은 조금씩 자신의 빛을 감추고, 감춘 빛만큼 땅 위의 건물들이 제 모습을 찾기 시작한다. 바다 끝에 깔린 구름 위로 하나의 선에서 시작한 붉은 기운은 면을 이루면서 자신의 영역을 넓혀간다. 드디어 하늘 위의 목성도 제 빛을 던져버리고, 땅 위의 가로등도 제 빛을 놓아버린다. 동쪽 바다 위 넓게 드리웠던 포돗빛의 푸름도 사라지자, 이제부터 햇빛이 모든 빛을 대신한다.

 
하루는 모든 빛의 물러섬으로부터 시작한다. 새로운 태양은 이전의 어둠이 아니라, 어둠 속의 빛을 대신한다. 이전의 빛이 있으므로 어둠은 생명을 잉태할 수 있다. 어둠을 뚫는 빛은 서로 공존한다. 검음을 비켜 세운 동쪽 하늘의 푸르름과 바다 위 넓게 펴진 붉은 선, 그 위의 노란 띠, 혁혁한 별빛 등등은 서로 함께했다. 이러한 빛들이 물러섬으로 인하여 새로운 태양은 자신을 드러낸다. 어둠 속에서 꿋꿋하게 버틴 빛들이 새로운 태양을 낳는 것이다. 어둠 속에서 자신의 소명을 잃지 않았던 빛들은 연면히 이어온 생명력 이외의 것이 아니다.

이 시대의 어둠은 어떤 모습으로 우리를 감싸고 있는가?

정치제도로서 대의제는 이제 민주주의를 담지하지 못한다. 이제 그 효력을 다 하였다. 대의제의 역사적 소임은 끝났다. 그렇지만 마지막 남은 힘을 다해 우리를 유혹하고 있다, 우리가 알아서 할 테니 너희는 가만히 있으라고.

경제질서로서 자본주의는 만천하에 제 민낯을 드러내었다. 결코, 노블레스 오블리주나 착한 기업, 공정한 경쟁 따위의 코스프레로는 감출 수 없는 적폐가 드러나기 시작했다. 비정규직에 대한 수탈을 넘어 이제 정규직이나 교직원, 공무원까지 옥죄어야만 할 정도로 다급해졌다. 재화의 축적을 통한 결핍의 해소라는 자본주의의 동력은 종착역에 이른 기차처럼 멈출 수밖에 없다.

우리는 어떤 형태의 빛을 밝혀야 할까?

'니들이 원래 그렇지'라는 불신에 근거한 비판은 힘이 없다. 불의를 처음 대면한 것처럼 '세상에 어쩜 그럴 수가'라고 진심으로 맞서야 한다. '나는 니들이 그럴 줄 이미 알고 있었다.'라는 자기 과시는 고립을 자초할 뿐이다. 저들의 행위가 얼마나 몰상식하고 저급하고 비열한지를 조목조목 밝혀서 거기에 포획된 자기 맨살의 부끄러움에 스스로 대면토록 해야 한다.

그리고 자신의 요구를 대변해주는 정치인을 찾을 것이 아니라 자기와 같은 요구를 하는 사람을 찾아 자율적 결사체를 구성해야 한다. 다방면의 결사체는 사회적 세력 균형을 강제하고 민주주의의 실질을 굳건히 할 것이다.

이렇게 빛을 내는 것은 어려울뿐더러 아직은 온 세상이 캄캄한 어둠으로 덮여있다. 뿔뿔이 흩어진 보잘것없는 빛들만이 듬성듬성 자신의 자리를 보존하고 있을 뿐이다. 하지만 새벽의 여명처럼 조금 지난 후에는 태양이 우리의 빛을 대신할 것이다. 그때까지 신심을 갖고 버텨야 한다. 대안없는 오기가 아니라 쉼 없는 준비로 버텨야 한다. 세상 모든 것은 차면 기운다. 기회는 오게 돼 있다. 마지막 남은 목성의 빛남으로 버텨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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