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가 5.18 민주화운동의 주축이었다고 한다면 순천은 6.10 민주항쟁의 처절한 지역이었다. 당시의 월간 ‘말’지에 따르면 87년 6월 26일 순천 시가지엔 5만명의 인파가 전두환 독재정권 타도를 외치며 행진을 한 것으로 기록돼 있다. 그 때 순천의 인구가 12만명이었다니 참으로 놀라운 참여 행렬이었다.

(사)광주전남6월항쟁이 편찬한 1987.6월항쟁 순천,광양 구술서에 나온 김영현씨(당시 순천국민운동본부 사무국장)는 “전남의 다른 지역에서는 그렇게 크게 일어나지는 않았다”고 회고했다. 김씨는 “그 해 5월쯤 민족민중의 해방을 위하여라는 플래카드를 걸고 강연을 한 고영근목사가 경찰에 연행되자 장로회청년회등 다수가 경찰서에 찾아가 항의 시위를 한 것이 순천 6월 항쟁의 도화선이 됐다”고 말했다. 이 때 이 지역에서 처음으로 최루탄이 터졌다.

순천대생이었던 류호형씨는 “항쟁 당시에 순천대 정문이 작아서 전투경찰이 막아서면 나갈 수가 없어서 학생들이 운동장 담벼락을 무너뜨리고 축구 골대로 밀어붙여 시내로 나갔다”며 기억을 더듬었다. 이들은 순천시장실까지 들어가서 전두환 사진 박살내고 인근에 있던 민정당사 현판도 부쉈다고 한다.

6월 20일에 시위는 전환점을 맞는다. 시위중인 순천대생을 향해 경찰이 사과탄을 발사해 20여명이 다친 것이다. 이 광경을 지켜본 시민들이 급기야 시위대에 합류했다.

순천의 6.10항쟁에는 고등학생들도 한자리했다. 안세찬씨(당시 순천대생)는 “우리들이 한 일을 고등학생들에게도 알리기로 하고 시내 각 고등학교에 삐라를 뿌렸다”면서 “6월21일 학생 86명이 연행됐는데 대부분이 고등학생이었다”고 말했다. 고등학생이었던 김용재씨는 “6월 24~25일 경으로 기억되는데 고등학생들이 대거 참가했다. 경찰들이 최루탄을 쏘고 해산시키면 순천여고 방면으로 물러나 다시 모여 다친데는 없는지 안부를 물었다”고 회상했다. 매산고, 금당고, 순천고생들이 모여서 쉬고 있을 땐 주변 상가주인들이 김밥과 물을 나눠줬다고 했다. 그는 “순천고가 남문파출소 근방에 있어서 주로 순고 오거리에서 만났다”고도 했다.

6.10민주항쟁이 올해로 36년이 됐으나 여전히 피해규모나 피해자파악은 요원하다. 

순천지역에서 일어난 6월 민주항쟁 장면. (광주전남6월항쟁 사단법인 제공)
순천지역에서 일어난 6월 민주항쟁 장면. (광주전남6월항쟁 사단법인 제공)

그나마 당시 순천 김은수외과의원 김원장이 순천민주화운동을 이끈 공로로 자랑스런 6월 항쟁인상을 받게됐다. 고인이 된 김원장은 민주화운동 시위로 인한 부상자를 무료로 치료해줬다. 이와함께 목포지역에서 활동했던 극단 갯돌(대표 문관수), 광양지역의 박정규, 광주지역 김상집씨등이 같은 상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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