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수,순천,광양등 6개 여순10.19단체의 뜻있는 공동행보

29일에 치러진 여수 10·19유적지 답사는 어느 때보다 그 의미가 크다. 처음으로 각 지역의 여순10·19 단체들이 모인 것이다. 그동안 이들 단체들은 미묘한 갈등에 휩싸여 각자의 주장만을 펼쳤다는 지적이 많았다. 심지어 한 지역에서 조차 유족회가 반쪽으로 갈라지는 일도 생겼다. “큰 틀에서 보면 다 사소한 이유때문이어서 안타깝다”고 최미희 순천시의원은 말한다.

이를 의식한 듯 이번 답사에 참가한 여순10·19 관련단체들은 진실규명과 희생자 명예회복을 한 목소리로 주장했다. 여수지역사회연구소 박종길 신임소장은 “무엇보다도 여러 단체들이 힘을 합쳐 진실을 규명하고 희생자들에 대한 명예회복을 위해 노력해야 한다”라고 말했다. 정유경 여순해설사는 “제주 4·3과 달리 여순10·19는 여수, 순천, 광양, 고흥, 보성, 구례등 광범위한 지역에서 일어났기 때문에 화합이 가장 중요하다”고 말했다. 구례10·19 연구회의 황정란씨는 “이런 모임을 자주 가져 진실규명에 부족한 부분을 보완해야 한다”라고 말했다. 황씨는 이어 “구례 유족들이 자신들의 요구에 힘을 실어주고 어떤 중요한 사항에 대해 의논할 구례지역의 시민단체가 필요하다는 의견이 있어서 구례지역 연구회가 발족됐다.”라고 덧붙였다.

당시 육군 제14연대 안에 설치된 군수품 저장소.
당시 육군 제14연대 안에 설치된 군수품 저장소.

첫 도착지는 당시 육군 제14연대 주둔지다. 제주 4·3을 진압하라는 출병명령을 “같은 민족에게 총부리를 겨눌 수 없다”며 지창수 상사등이 거부하며 들고 일어났던 곳이다. 여순 10·19의 시작점으로 중요한 유적지중 하나다. 이 곳은 일제가 해군202부대와 군수공장을 지으려고 전남동부지역의 민간인과 학생들을 강제동원한 아픈 역사의 현장이기도 하다.

여수 진입로인 인구부에서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다.
여수 진입로인 인구부에서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다.

인구부 전투는 여순10·19가 발발한 지 5일후에 일어난다. 인구부는 여수로 들어가는 첫 관문이었다. 그 때의 동족상잔을 지켜봤을 연등동 벅수(이정표 역할을 하는 장승)는 지금도 그 자리를 지키며 지그시 눈을 감고 있었다. 석상일지언정 눈뜨고 세상을 바라보기 싫을 법도 하다. 박발진 광양10·19연구회장은 “순천을 하루만에 접수한 진압군이 기세등등하게 진입했으나 당시 송호성사령관이 부상당하는 등 봉기군에 밀려 후퇴했다”고 설명했다. 이 전투에서는 47명의 여수시민들이 붙잡혀 즉결심판을 받아 처형됐다.

부역협의자는 민간인임에도 군사재판을 받았다.  
부역협의자는 민간인임에도 군사재판을 받았다.  

그 시절의 종산국민학교(현재 중앙초)에 와서는 참담한 심정이 극에 달했다. 김소장의 가감없는 해설을 차마 글로 옮기지 못할 정도였다. 이곳에서는 부역혐의자에 대한 민간인을 상대로 한 진압군의 심사가 이뤄졌는데 그 기준이 어이없다. 손바닥에 총을 쥔 흔적이 있는 자, 흰색 지까다비(일본식 운동화)를 신은 자, 미군용 팬티를 입은 자, 머리를 짧게 깍은 자 등등이 부역자로 내몰린 것이다. 기록상으로 보면 3천7백여명의 시민이 9차례의 군사재판을 받았다. 인근의 만성리, 민드레미 골짜기, 봉계동 등지에서 암매장돼 발굴된 시신들은 모두 이 학교에서 재판을 받았던 것으로 의심되고 있으나 여전히 진실규명이 안되고 있는 곳이기도 하다.

형제묘에 대해서는 생생한 증언이 있음에도 시신이 불에 타버려 유족들은 가족을 찾을 수 없어 한이 되었을 것이다.
형제묘에 대해서는 생생한 증언이 있음에도 시신이 불에 타버려 유족들은 가족을 찾을 수 없어 한이 되었을 것이다.

종산국민학교에서 부역자로 몰려 사형을 언도받아 총살당하고 불태워진 1백25명의 시신들은 그 형제를 알아볼 수 없었다. 유족들은 결국 가족 찾기를 포기하고 그 자리에 형제묘라는 푯말을 세워줬다. 죽어서라도 형제처럼 함께 있으라는 그들의 염원이 담겨있다고 한다.

답사를 마친 여순10·19 단체들은 짧은 간담회를 가지고 오는 10월에도 다시 만나 진실을 밝히고 희생자 및 유족자 명예회복을 위해 속도를 내자는데 의견을 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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