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물 안 개구리였다. 아니, 온실 속의 화초였다.

진보의 불모지 충청북도 영동군에서 세상과 타협하지 않고 자신의 길을 걸어온 사람과 인터뷰를 한 적이 있다. 온갖 핍박과 혐오 속에서 ‘살아남았다’는 그를 보며 말로만 듣던 진보의 현실을 직접 마주하게 된 것이다.

영동군 학산면에서 아이돌봄 활동을 하는 유양우 비아들협동조합 이사장. 학생운동 이후 농촌 현장으로 내려와 농민운동을 하던 그는 진보의 볼모지인 영동에서 '살아 남았다'고 전했다.
영동군 학산면에서 아이돌봄 활동을 하는 유양우 비아들협동조합 이사장. 학생운동 이후 농촌 현장으로 내려와 농민운동을 하던 그는 진보의 볼모지인 영동에서 '살아 남았다'고 전했다.

 ‘빨갱이’ 소리를 듣는 그가 지역에서 공익사업을 추진해도 지지해주는 사람이 없다. 오히려 ‘그가 하기 때문에’라는 기막힌 이유로 그의 일을 막으려 애쓴다. 자신의 사상을 적나라하게 드러내지 않음에도 부정한 사람으로 낙인찍혀있다. 이 지역에서 진보 운동을 하며 살아가는 사람의 삶이 얼마나 고통스러운지 느껴졌다. 그럼에도 묵묵히 활동을 해나가자 마침내 그의 활동을 알아주는 사람들이 생겨났고 관의 지원을 받는 것에 이르렀다. 존경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내가 한 달 동안 활동했던 이곳은 영향력 있는 시민사회단체도 흔치 않다. 영동민주시민회의라는 단체가 있긴 하나, 그들의 이야기가 지역을 바꾸기에는 미약하다. 오죽하면 ‘영동군은 공무원하기 편한 지역’이라는 말이 흘러나온다.

윤석열 대통령의 행보에 발 맞춰 충북도지사가 친일 발언을 해도 지역이 동요하지 않는다. 친일발언을 규탄하는 현수막을 달아도 하루 만에 철거된다. 내가 사는 전남과는 완전히 다른 세계였다.

친일 발언을 규탄하는 충북도지사의 현수막이 단 하루만에 철거됐지만 지역에서 크게 공론화가 되지 않는다. 전남에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다.
친일 발언을 규탄하는 충북도지사의 현수막이 단 하루만에 철거됐지만 지역에서 크게 공론화가 되지 않는다. 전남에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다.

내가 태어나서 지금까지 벗어나 살아 본 적이 없는 전남은 충북에 비하면 진보운동을 하기에 정말 잘 가꿔진 비옥한 토양이다. 학교에 다니기 위해 올라온 순천에서 지내면서 자연스럽게 진보적인 활동들을 경험했다. 하지만 ‘중국집 아들은 짜장면을 싫어한다’는 말이 있지 않은가. 활동을 통해 느낀 것은 사실 진보라고 불리는 것들에 대한 의심이었다.

현 진보는 사회 속에 갇혀 있다는 것이다. 사회 속 하나의 범주로 규정된 세력이기 때문에 진보를 진보라고 부를 수 없다는 것이다. 진보가 사회변화를 추구한다는 의미라면 진보 단체는 사회현상을 분석하는 것을 넘어 우리가 인식하지 못했던 부조리를 드러내 사회의 한계를 보여주거나 한계를 넘을 수 있는 대안의 불씨를 만들어야 한다는 게 내 생각이다. 그리고 지금은 이런 단체를 찾기 어렵고 뉴스를 통해 볼 수 있는 진보·보수 갈등은 공허한 진영 다툼으로 봤다. 진보가 일반적인 사회를 경험했던 나의 편협한 생각이다.

내가 살던 곳과 정치적 지형이 다르고 시민사회단체를 찾아볼 수 없는 지역들을 취재하며 지금까지 갖고 있던 생각들을 다시 돌아볼 필요가 있었다. ‘진보를 진보라 부르지 못한다’고 단정 짓기에 진보 운동은 아직 갈 길이 멀다. 한계가 있다고 말하기에는 뿌리내리지 못했다. 잘못된 점을 지적하는 것도 어느 정도 정착이 된 이후에 해도 늦지 않다.

어쩌면 진보가 부정되고 있는 이곳이 진보 운동의 대안을 만들어 내는 곳이 될지도 모른다. ‘변화는 변방에서 시작된다’는 말이 있듯이 진보가 나아갈 방향은 진보를 외치기 척박한 지역에서 만들어 낼거라고 생각한다. 어떤 가치가 당연하다고 많은 사람이 생각하는 곳에서는 그 가치의 문제점을 인식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진보 운동을 하던 사람들이 이곳 사람들의 마음을 얻는 과정에서 진보가 나아가야 할 방향의 실마리를 찾을 수 있을 거라고 본다. 그래서 나는 새로운 진보의 가치가 탄생할 가능성을 이곳에 건다.

영동군청 앞에서 기자회견을 하는 영동군농민회. 영동 지역 시민단체와 금속노조가 함께 연대한 기자회견이지만 순천에서 열리는 기자회견과 비교하면 턱없이 초라하다.
영동군청 앞에서 기자회견을 하는 영동군농민회. 영동 지역 시민단체와 금속노조가 함께 연대한 기자회견이지만 순천에서 열리는 기자회견과 비교하면 턱없이 초라하다.

누가 뭐라 해도 자신의 길을 지켜 온 사람들이 있어 지금의 영동이 있다. 수많은 역경을 겪었음에도 주저앉지 않고 여전히 더 나은 사회를 꿈꾸는 그들을 통해 영동의 밝은 미래를 느낄 수 있었다. 지치지 않기만을 바랄 뿐이다. 그리고 이런 상황에 놓여 있는 사람들은 비단 영동에만 있는 것은 아닐 것이다. 진보라는 메마른 땅을 일궈 비옥한 토양을 만들어 가고 있는 지역 활동가들을 진심을 다해 응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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