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여수와 순천의 교집합에서 유년 시절을 보냈다. 나의 본가는 순천과 여수 사이에 있다. 여수행 35번 버스와 순천행 96번 버스가 공존하는 곳이다. 행정구역상으로는 여수에 속한다.

나와 순천의 깊은 연결은 우리나라가 월드컵 역사에서 대이변을 연출한 2002년부터다. 진학할 고등학교를 정해야 할 무렵 순천에 고등학교가 생긴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공부에 흥미가 없었던 나는 ‘고등학교 졸업 횟수라도 잘 기억하자’라는 생각으로 순천제일고등학교에 입학했다.

그 당시 제일고는 학교 건물이 없어서 순천율산초등학교에 얹혀살았다. 급식도 교복도 없었다. 학생들은 율산초 빈 교실 중 일부를 사용했다. 사복을 입고 등교했고 점심으로는 도시락을 먹었다. 그때 나는 고등학생이었지만 초등학생의 마음으로 살았다. 말뚝박기나 물총놀이 등을 했는데 율산초 학생과 물총 싸움을 하면 항상 당했다. 집주인을 이길 순 없었다. 그러다 2003년부터 우리 건물의 학교로 등교했던 것 같다.

2005년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전광역시에서 대학 생활을, 2008년부터 2016년까지 대전과 서울에서 공연기획과 예술행정 일을 했다. 2015년 12월 31일, 여러 가지 복합적인 이유로 내 직장생활 중 가장 오래 그리고 애증이 넘쳤던 곳을 퇴사했다. 그와 더불어 서울살이도 싸목싸목 정리했다.

2016년 9월 말, 서울살이를 완전히 정리하고 본가인 여수에 돌아왔다. 그때부터 2017년까지는 여수와 순천의 구인 공모를 살폈다. 그러다 순천의 한 기관 구인 공모에 응시하고 면접을 봤다. 마을공동체 관련 기관이었는데 당시 면접관의 말이 내 맘속에 지금까지 존재한다.

“고등학교 졸업 이후에는 다른 지역에서 활동했네요. 순천을 잘 모르겠네요.”

면접관의 말에 나는 ‘새로운 시선으로 순천을 볼 수 있을 것’이라고 답했다. 하지만 그의 말은 사실이었다. 그동안 변화한 순천과 순천의 곳곳을 나는 알지 못했다.

면접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버스 안에서 ‘나는 내지인인가? 외지인인가’하는 고민으로 혼란스러웠다. 지역에서 나고 자랐지만, 대학교 이후부터는 소위 말하는 대도시에서 생활했고 경력과 경험도 그곳에서 쌓아 올렸다. 다시 지역에 왔으나, 나는 외지인이었다. ‘그 고장 사람’으로 태어나 ‘그 고장 사람이 아닌 사람’으로 정의되었다.

그 과정에서 책방심다와 인연을 맺었다. 거기에는 나와 비슷한 외지인들이 있었다.

배우자를 만나서 순천으로 온 사람.

지나가는 여행길에서 마음에 드는 곳이 나중에 찾아보니 순천이라서 이사를 온 사람.

서울에서 직장생활을 하다가 고향인 순천으로 온 사람.

그들과 일상을 보내고 마음을 나누면서 ‘외지인’의 삶을 서서히 받아들이게 되었다. 오히려 내지인과 외지인의 경계가 모호하고 흐릿해졌다. 그 둘을 굳이 나눌 필요가 없었다.


차화진은 여수에 사는 생활작업자, 잔기술보유자, 기획인이자 행정인이다. 연암 박지원과 화가 장욱진 그리고 피아니스트 백건우를 좋아한다.

초중학교는 여수, 고등학교는 순천, 대학교는 대전, 직장은 대전과 서울에서 다녔다.

㈜문화아이콘을 시작으로 대전예술의전당, 한국문화예술회관연합회, 대한민국오페라축제추진단, 책방심다 등을 거쳐 현재 프리랜서로 활동하고 있다.

차화진 프리랜서
차화진 프리랜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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